창고/문자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담음 2012. 12. 26. 02:17

그는 이번 휴가에 대해서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고, 동료중 누구에게도 일부러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그저 말을 안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수수께끼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잿빛 일상에 피부색까지 물들어 가고 있는 그들을 약올리기에는 더없이 유효한 방법이었다. 회색 종족은 자기 이외의 인간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초록이든, 회색 이외의 색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에 빠진다. (95면)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15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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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펼치게 된 독자들은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된 그 남자처럼 온 몸을 죄어오는 느낌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이상 출구는 없다는 생각이 분명해지지만 그렇다고 책장을 덮어버리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 책 읽는 동안 내 느낌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문구. 평소 같으면 50면 정도 읽고 던져뒀을 텐데 아침에 읽기 시작해 오후 네시에 끝을 보고야 말았다. '재미'가 있어서라기 보다 정말 모래 구덩이에 갇힌 느낌이었다. 분명 에로틱한데 짓눌린 느낌이다. (기껏 크리스마스 이브에 읽은 소설이 이거라니...)


"읽다보면, 왜 읽고 있는지 영 모르겠는 소설책이 있다. '이걸 꼭 읽어야 할까?'는 생각이 들면서도 끝내는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나름대로 재밌는 소설책들. <모래의 여자>도 그런 소설책 목록에 들어갈 만하다. 보통 그 계통 소설들이 그렇듯 <모래의 여자>도 뜬금없는 설정에 황당무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