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문자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담음 2013. 9. 9. 23:42



2~3년 전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이란 생각을 했다. 한창 삶삶삶 타령을 할 때 읽었으면 아주 좋아서 미쳤을 것 같다. (전혜린 에세이도 아마 비슷한 계열일 거라는 느낌이 든다. 엄마 고등학교 시절에 전혜린 열풍이 불어서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의 인기가 치솟았고 더불어 루이제 린저의 소설도 열독되었다고 한다. 그 시대의 문학 소녀들의 분위기가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이고 아주 그냥...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야자와 문제집에 찌들어 있었다는 게 정말 안타깝다. 책과 영화를 친구들과 공유하던 풍습(?)은 거의 열세살 무렵에 마무리가 되었다-_-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라오스 여행에서 체력이 떨어갈 때쯤 읽었다. 귀퉁이를 접어놨던 모든 페이지를 옮기긴 어렵고 일부만 발췌한다. 


가장 임팩트 있었던 부분은 두군데인데, 극중의 니나가 쓴 유대인 수용소에서 하루 아침에 석방된 이들에 관한 짧은 소설(전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과 니나가 안락사에 대해 경멸을 숨기지 않고 상대의 논리를 논파하는 부분이다. 


197p

B교수는 조심스런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인간 생명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형법은 사형을 허용하고 있고 국제법은 전쟁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법률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런 법률이 없다. 이 말은 강의 시간에는 조용히 받아들여졌으나 나중에 격렬한 토론을 유발했다. 학생 중 하나가 그런 법률은 이미 독일 민족이 나약한 휴머니즘의 견해에 반대해 강자의 지배를 옹호할 때부터 있었다고 주장했다. ... 이때 다른 여학생 하나가 한 무리의 짐승을 역병에서 구하려면 병든 짐승들은 죽여도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토론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

니나의 편이 되어서 싸운 두세명의 학생들은 완치될 수 없는 정신병자가 아직 인간인지 이미 인간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치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며, 오진의 가능성도 있고, 치료 방법이 개발될 수도 있으며, 여태까지 불치로 간주되었던 질병도 고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니나가 정신병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없으며, 불치의 병자이면서도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반면에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고 말했다. 이에 누군가가 나서서 그렇다면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인간도 제거시켜야 한다, 국민은 이들과 정신병자를 희생시켜야 한다, 고 말했다. 이때 니나는 소리쳤다. 그럼 당신은 횔덜린도 죽였겠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니나는 완전히 자제력을 상실하여 복도까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질렀다. 생과 사를 결정하는 재판관은 누가 됩니까?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살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당신 같은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재판관이 되겠죠. 그리고 그들은 법이라는 미명하에 한번 죽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옳든 그르든 상관 않고 계속 죽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살인자들만 남겠지요. 나는 이에 반대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살인을 허가하고 그 살인에 불가피함과 선이라는 딱지까지 부여하는 국가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233p

니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자신도 말을 해놓고 놀랐다. 그럴 것이 전에는 이런 수상한 시대에는 자식이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는 마흔여덟이다. 



극중 니나의 생애는 작가 루이제 린저의 생애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나치에 맞서 저항해 투옥되고 저서들이 금지되고... 뭐 그런 삶을 살았음. 전후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산문 작가이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함께 현대 여성계의 양대산맥이라는데 음 ㅎ_ㅎ


1911년 태어나 2002년 사망했고(무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니! 민음사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 놀라움.) 혹시나 우연히 옆에 책이 있던 제발트와 동시대 인물일까 해서 찾아봤더니 제발트는 1944~2001. 더 늦게 태어나 더 일찍 죽었구먼요.


생의 한가운데는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었고(퍼블릭 도메인은 작가 사후 50년(2013년부터 70년으로 연장)이니 아마 다들 7~80년대에 나온 해적판이지 싶다. 1950년에 쓰인 작품이니 무려 마흔 전에 썼다는 이야기이구먼요. 


전체적으로 인상적이고 좋긴 했는데 음; 요즘 나를 뒤흔드는 류의 소설은 아니라서 별다른 코멘트를 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놈의 '삶타령'(꼭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고)은 이미 스스로 지겹도록 읽고 듣고 보고 늘어놓은 터라 이제 조금 나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게 꼭 순간순간의 '격정'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


2011년 발간된 그녀의 전기는 그녀가 젊은 나치 지지자로 나치를 위해 영화 대본을 썼다고 밝혀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나는 되려 루이제 린저의 글로 미루어 그 당시에 나치의 선전에 '잠시' 넘어갔던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더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도 이런 과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