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40213

담음 2014. 2. 12. 18:10


예전 블로그가 공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어제야 알게 됐다; 아이쿠 창피해...

*

어영부영 아이폰을 사게 되긴 했는데;
싼 가격에 혹해서... 

좋지 않은 구매인 것 같다. 지금 핸드폰도 멀쩡하고... 
무엇보다 새 아이폰은 용량이 너무 작다. 취소할까...

*

철기 시대에 황금 인생을 바라는가
는 별로 좋은 비유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이동진은 항상 비유가 좀 구려 ㅋㅋ)

그 문장이 담은 내용은 머리에 계속 남는다.

*

스페인어 안 다니니까 주중에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여튼 3월에는 C도 오고, 2월에는 사람도 좀 안 만나고 지내야지.
요 근래 왜 이렇게 바빴지? 읽던 책들이 다 여기저기 내팽개쳐져 있다;



이번 주 씨네21의 호프먼 기사가 좋았고,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5876
김혜리의 영화일기의 'The Wolf of the Wall Street"에 관련한 글이 재밌었다
신형철의 <로렌스 애니웨이>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 대한 것도. 
최근에는 박권일의 강신주 비평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930 이 인상 깊었고
문강형준의 평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23145.html 은 짜증났다.

내게 최근의 강신주가 불편한 지점은
그가 '힐링'을 해서도 아니고 인문학을 '팔아먹어서'도 아니다
솔직히 강신주 현상이 불편하다기보다는(사람들이 강신주를 더 많이 읽는 게 뭐가 나쁜가?)
강신주의 말들이 불편한 건데 그건 그의 '돌직구'라는 스타일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틀릴 수 있다는 일말의 의심도 없는 그 확신! 

"강한 자아는 악의와 소외로 가득찬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거대한 악에 저항하는 작은 개인의 숭고성!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강한 자아는 필연적으로 멜랑콜리한 주체가 된다. (...)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dignity)을 지키며 살아남느냐가 관건이다. 강신주의 인문학이란 내가 보기엔 바로 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전부 수렴된다. (...)

솔직히 강신주 말 듣고 힐링이 되나? 힐링보다는 '그래! 내가 강해져야지'라고 마음 먹는 자기계발에 더 가깝지 않은가

"강신주는 '나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하는 게 아니며 멘토도 아니'라고 말해왔다. "나를 멘토로 생각하고 강의를 들으러오면 나한테 욕 듣는다. 내가 해주는 건 네 고민은 별거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뭔가 고민이 있으면 억지로 어렵게 만들고 그걸 고민하는 척 한다."(<더 뮤지컬> 2013년 5월호) 문제는 멘토 스스로가 자신이 멘토가 아니라고 부인해도 사람들이 그를 계속 멘토라고 생각하고, 그의 효용이 떨어지면 또 다른 멘토를 찾아 떠날 것이라는 점이다. 강신주가 멘토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끝없이 멘토를 욕망하는 사회야말로 숙고의 대상이며 그런 욕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바로 인문정신이다. 강신주 스스로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뭔가 '다른 것'으로 포장하고 구별짓는 일은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는 비난할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철학자라면 그런 자신의 '구별하고자 하는 욕망'에게도 정직한, 혹은 풍자적인 돌직구를 날려야 하지 않을까."  


살면서 딱히 남 신세 지고 살지 않았다면 자신의 능력에 감탄하기보단 자족할 환경이 따라준 행운에 감사하고, 딱히 양심에 어긋나는 일 없이 산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인격에 감탄하기보단 그런 윤리적 딜레마가 생기지 않을 수 있던 행운에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