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옛집 강좌 – 근대 서울의 형성과 변화 (안창모 경기대 교수)
창고/도시 2010. 9. 5. 01:37
9월 1일 한성대 입구역 근처에 위치한 최순우 옛집에서 근대 서울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강좌를 들었다. 재밌는 부분 요약:
- 조선시대와 근대 서울, 그리고 현대의 서울 행정구역을 비교
- 서울에 한강이 들어온 것은 약 40년전쯤,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3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의 서울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사대문과 도성을 경계로 삼았다. '성저십리'라고 해서 도성 밖 10리 바깥까지는 금장/금송 정책을 펼쳤다. (무덤을 만들 수 없고 나무를 벨 수 없다.) 땔감을 구하기 어려우므로 도성 밖에는 시가지가 형성되지 않았고 왕십리, 구용산(전자랜드 쪽), 용강동 쪽이 거의 유일한 시가지였다.
- 이전에는 서대문 부근이 서울의 중심지이었으나 개항 후 인천으로 통하는 쪽이 발전하면서 도시의 성장축이 남대문/동대문 쪽으로 이동하였다. 현재는 서대문 근처가 별로 번화하지 못한 상태이다.
- 후암동에 일본인 주거지가 있었다. 일제시대에 서울의 동북쪽은 한인 거주지로 도시한옥이 많이 지어졌고, 남서쪽 즉 용산이나 갈월동 쪽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다.
- 한강 이남이 개발된 것은 김신조 1.21. 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6.25 때 한강 이북의 거주민들이 많아 대피시키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등). 당시 서울시장(김현옥?)은 한강 이북에 거주민이 많은 것을 정치적 부담으로 여겼고 박정희 대통령 역시 휴전선에서 평양과 서울과의 거리가 불균등 한데에 불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김신조 사건이 있은 후 본격적으로 강남지역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강제 이주를 시킬 수는 없으므로 서울 시내 유수 공립 고등학교들을 이전시켰다. 경기고가 먼저 강남으로 이전을 하고 따라서 휘문고 등 여러 학교가 이전을 함으로써 현재의 '강남 8학군'이 형성되었다. 이 때 김신조 사건 이전에 지어진 세운상가는 강남으로 시민들이 빠져나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산전자상가가 지어져 이전 전자상권까지 빼앗김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세운상가 근처에는 종삼이라고 불리는 사창가가 종묘 근처에 위치했었는데 세운상가가 몰락하면서 종삼이 상권을 잡아 세운상가가 포르노산업의 중심으로 서게 된다.
- 서울의 인구가 팽창하면서 주거공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는데, 목조건축인 한옥에서는 다층구조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 했다. 서구의 건축에서는 주거수요 급증에 대해 high-rise apartments로 대응했지만, 한옥에서는 다층구조가 불가능해서 도시한옥이라는 형태로 최대한 공간을 활용하게 되었다. 이후에 내화 콘크리트를 사용하게 되면서 다층건축에 온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영등포 지역이 이차세계대전 때 군수산업기지로 이용되어서 공업이 급격히 발전했었다. 이후 공장이 시외로 나가면서 그 자리에 아파트가 건축되어서 현재 영등포의 아파트 단지 별 스타일을 보면 공장이 이전해 나간 연대를 알 수 있다.
- Narkomfiu building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축으로 지어진 주거공간.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킨다는 사상 아래에 주거공간에 부엌을 제거하고 공동부엌, 탁아소 등을 지은 노동자 집합주거건축이다.
별개로 최순우 옛집 툇마루 좋다. 나도 툇마루 있는 도시한옥에서 살고 싶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