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923 김혜리가 만난 사람
2011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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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글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단순한 정보성 글이라도 단어가 범상치 않다. 정공법으로 치고 들어온다고나
할까. 진득하게 진심에 밀착하려는 분투가 전해져온다. 첫
문장부터 치고 들어온다. 그러기엔 이 여자는 너무나 섬세하다. 치고
들어온다기보다 정곡을 집는다. 그건, 의도적으로 글을 ‘강하게’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그저 꾸밀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진심을 쓴다.
마음으로 쓴 글은, 정말로 전해진다. 가장 내밀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서문과 발문을 읽으면서
나는 가장 많이 울었다. 신형철의 서문을, 김혜리의 발문을
읽으며 나는 진동한다. 꾸밀 줄 모르기에 문장 하나하나가 빽빽하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다듬고 재배열하고 수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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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될 수 있다면 출판편집인을 하세요. 내 이름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문학을 예술을 사랑하고
그들을 보살피고 싶다면, 그리고 그걸로 족하다면. 당신은
지독한 짝사랑을 하고 있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의
글을 쓰고 싶다.
그게 나의 욕심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나의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닌 나의 이름에 대한, 주위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짝사랑은 견디지 못하고 금방 다른 아이를 좋아해버리는 참을성
없는 여학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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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호되고 차가운 단어를 늘어놓으며 힘센 척할 때라도 우리는 결국 영화를 만드는
이들을 뒤쫓는 메아리로서 영화의 게임에 참여하고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영화는 아무리 허약하다
해도 어떤 악평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입니다. … 영화평을 쓰는 우리의 대부분은 좌절한 창작자이거나 좌절한
관객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오만하다면 오만하고 초라하다면 초라합니다.”
(<영화야 미안해> 여는 글)
“이제 압니다. 기사라는 명목으로 제가 썼던
글과 글 비슷한 끼적거림은 기실 일기였고 얼굴을 알 수 없는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였습니다. 고백컨대
그것은 월급쟁이의 은밀한 횡령이었습니다. 모두가 보기 때문에 누구도 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마음
놓는 일기였고, 수취인불명의 편지였습니다. … 그러나 왼쪽
서랍은 이미 스쳐지나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으나, 차마 버리지 못하는 영화들의 몫입니다. 이 책은 제 왼쪽 서랍입니다. 편애의 기록입니다. 제 초라한 왼쪽 서랍을 왼손잡이 당신에게, 잡동사니에 눈길이 머무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닫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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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화양연화>가 보는 이에게 남기는 깊은 울림을 적은 뒤 “그것은 아마 우리
중 대부분이 실패한 연인이기 때문 아닐까. 온전히 내 것이 될 불변의 사랑을 꿈꿨으나, 번번이 그 여린 빛이 내민 손 한치 앞에서 사그라드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이라고
끝맺을 때, 그러니까 너무 많이 그리고 쉽게 말해져버려 이제 거의 죽어버린 의미가, 좋은 영화와 만난 그의 언어를 거쳐 촉촉한 생명을 얻을 때,
보기 드물게 첫 문장에서 ‘나’가 등장하고 더 뜻밖에도 그의 글에서는 유례없이 단호한 말투를
지닌 그 인터뷰 서문은 이 세상의 많은 이야기꾼들을 위한 변명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한 은밀한 그러나
최상의 위안이다. (발문, 허문영 영화평론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소심한 사람들의 괴력을 눈치채게 되었다. 대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들썩들썩 움직이는 동안 소심한 사람들은 주섬주섬 세상을 해석한다. 살아남기 위해 예민해질
도리밖에 없는 초식동물처럼 그들은 누가 힘을 가졌는지 계절이 언제쯤 변하는지 민첩하고 정확하게 읽어낸다. 미미한
자극에 큰 충격을 받고 사소한 현상에 노심초사하는 그들의 인생은 남보다 느리게 흐른다. 타고난 관찰자이며
기록자인 그들의 소극적 복수는 ‘이야기’다. 그들은 더디게 살기 때문에 삶을 사는 동시에 재구성한다. 목소리
큰 당신이 휘어잡았다고 생각하는 어젯밤 술자리에서 벽지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듣기만 하던 동료가 있었던가. 그가
잠들기 전 떠올린 스토리 속에서 당신은 놀림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매커니즘
중 하나라고 판명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말하다 中 김병욱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