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5 트라우들 융에


흥미로운 구석이 많아서.


IM TOTEN WINKEL(Blindspot) 2002

여기서 인터뷰만 따온 건가? 


- 히틀러가 엄청난 일을 해낸 부분은 따로 있죠. 독일 사람들의 양심을 조작했다는 겁니다. 한 병사에게 당신이 concentration camp에서 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난 그걸 극복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일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희생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책임은 내가 지겠다." 마치 한 사람이 누군가의 양심을 대리할 수 있다는 듯이요. 


5'00'' 


이 모든 악의 근원이 히틀러로 돌려지고 그의 개인적인 취향과 성격과 루나틱적인 면들을 더 들여다보게 되면 이 모든 것을 그 한 사람이 일으켰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가 매력적이었고, 좋은 상사였고, 다정한 아버지상이었다는 비서의 증언은 그와 그렇게 가까이 일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운명이 나를 그런 곳에 데려다놓을 줄 몰랐다는, 내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곳에 데려다놓을 줄 몰랐다는 그녀의 증언은 '어린 추종자'라는 말로 넘어가기엔 어려워보인다. 뭐, 그렇게까지 이 사람에게 harsh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지만. 


8'



최후의 순간까지/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멜리사 뮐러 지음/Claassen Verlag 출판사/272쪽


최후의 순간까지


지금 독일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는 단연 베른트 아이힝어 감독의 ‘몰락(Der Untergang)’이다. 1945년 베를린이 소련군에 함락되는 마지막 열흘 동안의 긴박한 상황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지하 벙커 안으로 피신한 히틀러와 나치 고위지도자들이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후 철저한 과거반성을 통해 다시 신뢰받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독일인들에게, 히틀러는 아직도 그 이름만으로도 상처가 되는 존재다. 그러나 독일의 유명배우 브루노 간츠(‘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연배우)가 연기하는 영화 속의 히틀러는 이러한 금기를 여지없이 깨고 있다. 점점 다가오는 대파국 앞에서 손을 심하게 떨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몰락하는 지도자로서의 히틀러는 심지어 관객들에게 연민마저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히틀러의 새로운 모습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 영화의 기본 텍스트가 된 책이 바로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로 유명해진 트라우들 융에의 ‘최후의 순간까지’(Bis zur letzten Stunde)이기 때문이다. 뮌헨 출신인 트라우들 융에는 1942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히틀러의 비서로 선택된 이후, 대다수의 나치 지도자들이 벙커 안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3년간을 최측근에서 지켜본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였다.


베를린 함락 이후 극적으로 탈출해 뮌헨으로 돌아간 융에는 이미 1947년에 벙커 안에서의 최후의 순간들을 기록해 놓았다. 그렇지만 50여년 동안 발표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지난 2002년에야 자료와 함께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내용을 공개했다. 인터뷰는 오스트리아 출신 감독 앙드레 헬러에 의해 ‘사각지대에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고, 곧이어 언론인인 멜리사 뮐러가 그녀의 기록들을 연대기적으로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 이 책이다. 융에 스스로는 범죄를 저질렀던 나치 정권에서 일했다는 것을 반성하기 위해 서술한 책이지만, 이 책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편집인 뮐러가 머리말에서 요약하듯 이 책은 ‘악인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인인 에바 브라운이 집안에서는 결정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애견 블론디를 산책시킬 때는 예의바르게 그녀에게 허락을 구했다는 일화나, 무릎이 유난히 희었기 때문에 짧은 바지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시든 꽃을 버리는 것을 마음 아파했기 때문에 꽃으로 실내를 장식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이야기들이 히틀러를 ‘악마’로부터 ‘보통 인간’으로 돌려놓는다.


이 책의 출판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트라우들 융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번 영화 ‘몰락’의 상영으로 다시 불이 붙었다. 독일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은 “우리가 ‘벌써’ 히틀러를 인간으로 그려도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논쟁의 포문을 열었고, 슈테른과 슈피겔을 비롯한 시사잡지들은 히틀러와 제3제국을 특집으로 내놓았다. ‘히틀러 붐’이라고 해도 좋을 매체에서의 집중조명은 그 시각이 비판적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위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일인들이 마음속 깊이 숨겨놓은 “우리만 잘못한 것이 아닌데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모든 죄를 뒤집어 썼다”는 피해의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들 융에는 책의 말미에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범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히틀러’가 내포하는 또 다른 시각은 “히틀러가 애초부터 악인이었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권력을 가진 한 보통 ‘인간’이 어떻게 잘못된 생각과 결정으로 모두에게 엄청난 비극을 몰고 올 수 있는가, 그리고 현대의 정치가들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트라우들 융에는 “세상과 작별하기 전에 나 자신과 화해하려 한다”는 그녀의 말대로, 자료를 공개하고 나서 이 책이 출판되기 전인 2002년 2월에 눈을 감았다.


(유현주·독일 훔볼트대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