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22 제임스 설터, 던컨 한나, 에드워드 호퍼
나가기 전까지 약간 시간이 남으니 일기를 좀 써보기로 한다.
어제의 나를 힘들게 한 문단. 띠지의 위력을 알았다?
알았다고 설터 읽으면 되잖냐고! 실은 제임스 설터는 조금 무서워서 안 읽고 있었다. 아마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부드러운 몰락'에 관한 이야기쯤이라고 말한다면 제임스 설터는 그냥 몰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모든 초월적인 버팀목들과 자발적으로 단절한 우리 근대인들이 치르는 대가는 이것이다.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인생 그 자체와 싸우며 보낸다. 근대 이후의 위대한 장편소설들이 대체로 ‘시간과 의미’라는 대립 구도 위에 구축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명한 악과 싸우는 로망스적 영웅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와 대결하는 신경증적 영웅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성공이 아니라 실패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의미란 무의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는 것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제임스 설터는 이 모든 것을 거의 무정할 정도로 정확하게 해낸다. ‘정확하다’라는 평가는 우리가 소설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설터가 어떤 감정을 묘사하면 그것에서 불명확한 것은 별로 남지 않는데, 그럴 때 그는 마치 다른 작가들이 같은 것에 대해 달리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悲感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신형철(문학평론가)
표지화는 Duncan Hannah
http://www.modernisminc.com/artists/Duncan_HANNAH/thumbnails/
The Honey Trap
The Isle of Islay
The Czech Spy
이거 참 멋있는 언니군.
The Parisian Spy
반면에 파리 스파이 언니는 별론걸?
http://www.modernisminc.com/artists/Duncan_HANNAH/?image=The_Parisian_Spy
맘에 안 들어서 그림은 뺐다.
에드워드 호퍼 같은 느낌이 난다.
아래는 에드워드 호퍼.
분명히 김혜리 기자 글에서 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음. 어디서 본 거지. 인상적인 글이 딸린 책이었던 것 같은데.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받은 약간의 충격. 이 그림은 뭐지? 아무것도 없는 이 평범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 적막감과 외로움.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나 외로운 그림들이다. 여기에 현대인이고, 단절이고, 소통이고 그런 수식어를 붙이기도 싫은 그런 단호한 외로움.
뻔한 구도와 채색, 관습적인 인물들과 새로울 것 없는 아이디어로 이루어진 그림 같은데, 결과물은 여전히 날카롭다. 너무나도 미국적이어서-그것이 날카로운 묘사이건 아니건 간에- 보자마자 불편했고 싫었지만 가끔 이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었다.
으. 이런 그림 좋아하는 사람 되고 싶지 않았다.
Nighthawks
Office Night
Chair C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