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멋있노 미친 부르디외 -.,-
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새물결, 2005
p. 64-5
... 결국 이러한 성향은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련의 지각도식과 평가도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영역에도 이항가능하며, 따라서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다른 문화적 경험들도 이와 비슷한 태도로 대하도록 하며, 각 경험을 상이하게 지각하고, 분류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똑같은 영화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버트 랭커스터가 나오는 서부영화'라고만 이야기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존 스터케즈 감독의 초기작품' 또는 '샘 펙킨파의 최신작'이라고 말한다. 이때 어떤 부분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따라서 제대로 영화를 보는 올바른 방식을 정할 때, 각자는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계급 전체("그 영화 봤니?"나 "그 영화는 꼭 봐야 돼"하는 식의 말을 통해 지침을 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각 집단에 의해 정통적인 분류방법과 거명할 만한 예술적 향유에는 반드시 따라다니게 되는 담론을 생산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비평가 집단의 협력을 통해 지침을 얻는다.
따라서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문화적 실천들이 학력자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변화하는 이유 또한 이런 식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 즉 여기서 학위나 미적 성향, 즉 정통 문화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항상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여러가지 요구사항 중 가장 철저하게 요구되는 미학적 성향을 획득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구성하는 조건이 나타나게 된다. ... 대략 학력자격이 미학적 성향을 몸에 익힐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부르주아적 혈통이나 아니면 전에 오랜 기간 학교에 다녀야 비로소 습득할 수 있는 준-부르주아적 존재양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특히(가장 흔하게는) 이 양자가 결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p. 67
파노프스키는 예술작품에 스콜라철학적인 의미의 '의도'라는 개념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 다시 말해 기능이 아니라 형식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다른 대상과 구분될 수 있다. ... 그렇다면 결국 기술적 대상의 세계와 미학적 대상의 세계 간의 구분선은 생산자들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인가? 실제로는 이러한 '의도' 자체가 이미 사회적 규범과 관습의 산물로, 이 양자가 결합해 항상 불안정하고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기술적 대상과 예술적 대상의 경계선을 규정한다.
... 오늘날 미적 지각 양식은 '순수한' 형식을 획득했지만 이 형식 자체가 이미 예술 생산 양식의 특정한 상태에 조응하고 있다. 기능에 대한 형식의 절대적 우위, 즉 재현되는 대상에 대한 재현양식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는 예술적 의도에서 생겨난 예술, 예를 들어 인상파 이후의 회화들은 이전의 예술이 조건적으로만 요구했던 순수 미적 성향을 정언적으로 요구한다.
p. 70
'과시적인 소비'의 단순 소박한 과시욕, 다시 말해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사치품을 조야한 방식으로 과시함으로써 남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과시욕은 순수한 시선의 독특한 능력, 즉 '인물' 자체 안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근본적 차이에 의해 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을 범인과 구분시켜주는 준-창조적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구 아저씨 말 참 잘하셈) 카리스마적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비대중적이고 실로 반-대중적인 예술" 그리고 또 예술의 "대중을 두 개의 '적대적인 카스트 계급', 다시 말해 이해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기묘한 사회학적 효과"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강화되는지를 보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읽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는 계속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것은 곧 일부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지 못한 이해 기관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시 이것은 곧 일부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인종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은 낭만주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별난 재주를 가진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문득 새로운 예술 양식의 변화는 이미 대중화되어버린 예술 양식에 반하여 또 다시 별난 재주를 가진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 양식을 개발하려는 시도의 반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면 대중 미학은 학문적 미학에 대한 거부인가 아니면 단순한 학문적 미학의 결여일 뿐인가?
p. 77
반대로 대중적 오락물은 관객들이 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 기회를 이용하여 축제적인 분위기에 집단적으로 끼어들 수 있도록 해준다. ... 이것들이 한층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무대장식의 화려함과 휘황찬란한 의상... 등 집단 축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화려한 구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 모든 형태의 코믹물 특히 '위대한 사람들'을 풍자하고 패러디함으로써 희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모든 형태의 희극들과 마찬가지로 ...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만족감을 주며 다시 이것이 사회 세계를 전복시키고 실천과 예의 범절을 뒤집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미적 이화효과(異化效果)
이러한 대중적 반응은 심미주의자의 초연함과는 정반대되는데, 이들은 (서부 영화나 만화와 같은) 대중적 취향의 대상 중의 하나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할 때면 언제든 분명히 드러나듯이 반드시 '즉각적인 지각'에 대해 탁월함의 척도로서 일정한 거리, 격차를 끌어들인다. 즉 '내용', 등장인물, 플롯 등으로부터 형식, 특히 예술적인 효과 쪽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려놓는다. ... 초연함, 무관심함, 공평무사함 -- 미학이론은 흔히 이러한 속성을 예술작품을 있는 그대로, 즉 자율적이며 자립적인 상태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실제로는 관심의 부재, 굳이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심함과 무관심, 다시 말해 스스로 달려들어 진지하게 검토하길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망각되고 만다.
...
어떠한 참여나 연관도 거부하는 태도, 안이한 유혹이나 집단적 열병에 '통속적으로' 몸을 맡기길 거부하는 태도(최소한 간접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형식적 복잡함이나 대상없는 재현을 선호하는 취향의 기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는 회화에 대한 반응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사진으로 찍으면 아름답게 나오겠느냐는 질문에 대중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통상적인 대상들 중 최초의 영성체나 일몰, 풍경 등을 '통속적이거나 추하다'고 거부하거나 '시시하고', 약간 '바보 같다'거나 '짜증나게 만든다'거나 또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빌리자면 조야하게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또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공인된 것들도 예를 들어 공사장의 철골구조나 나무껍직, 특히 양파 등의 시시한 물체들 또는 자동차 사고라든가 (렘브란트를 암시하기 위해 고른) 정육점의 고기 자르는 선반 혹은 (브알로를 연상시키기 위한) 뱀처럼 추하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나 예를 들어 임산부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되는 대상을 갖고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진이나 더욱 진짜 같은 사진을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재현 대상으로부터의 재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사람의 비율도 늘어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p. 86
(자갈을 찍은 사진에 대하여 저건 부르주아적 사진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노동자) 각주 35) 이와 관련하여 '대중' 미학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필연적으로 지배자들의 미학과 관련해 끊임없는 재규정을 요구하는 피지배자들의 미학이라는 점을 망각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