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25 배수아 당나귀들

<당나귀들>/ 배수아

p.11 신념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의 정신적 경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

p.29 이성 없이 살찜을 선택한 역사가 그대로 내 안에서 나날이 그렇게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야!

예술이란, 어떤 견해에 의해서라면,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거야. 그 중의 하나는 지금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칭송해. …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직 그것이 스스로가 추구하는 존재의 반영으로서만, 슬프지만 실패할 것이 분명한 그 끝없는 추구의 도정에서만 머물기를 원하는 것들이야. 그것이 추구하는 영역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이 멀고도 고귀해서 그 누구도 지상의 손길과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로 그 자신이 구제 불능의 장님이며 ‘이제 이루었다!’라는 환희의 선언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기 때문이기도 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가고 있지.그런데 누군가 길을 막고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하고 묻는다면 ‘나는 눈멀고 귀먹은 어리석은 당나귀요, 나는 내가 이룬 것이 아니요, 나는 내가 가진 것도 아니며 단지 내가 추구하는 것이지요.’하고 대답하겠지. 그가 쫓는 것은 아마도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어쩌면 영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고 그가 최대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추함’정도 겠지.

내 생각에, 너는 그냥 예술의 이상화된 아마추어리즘을 극단적으로 미화하는 거라는 느낌이 든다. 아마 그러고도 싶겠지. 왜냐하면 네가 거기서 발을 빼기 싫어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또 영원히 도달할 수도 없을 운명인 그런 몽상적 아름다움에만 가치를 부여한다면, 궁극의 가치를 오직 그렇게 추상적인 것에만 둔다면, 여기 현상으로 분명히 자리 잡고 있는, 살고 사랑하고 슬프고 격렬한, 이 인간의 직접 실존은 도대체 다 무엇이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세월을 성장하고 마침내 피어난 그런 예술들은 다 무엇인지, 

T의 반박을 듣게 되자 나는 들뜬 열정의 벼랑 위에서 바로 현실의 바다로 낙하해 버린 가마우지 꼴이 되어 바로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난감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바로 ‘말 더듬는 상태’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은 몽상의 시작이야. 그러나 나는 삶이 몽상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네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어. … 적어도 나는 가능한 한 최경계에서 작업하고 싶어. 이미 완성된 문법과 처녀지 사이에서. 

p.241

그 책은 작가의 상상력을 사색력과 결합해서 아주 유연한 솜씨로 흥미로운 스토리를 에세이의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도록 만든 것으로 보였다. 어쨌거나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경계를 넘어선 글’의 작가였다.

p.249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언제나 그녀 자신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수진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스스로를 충분히 오만하다고 느꼈으며 그 사실이 가슴이 벅차도록 통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거리의 모퉁이마다, 카페마다, 식당마다, 극장마다, 역의 플랫폼과 금요일의 디스코마다, 건널목의 신호등마다 심지어는 학교의 학부모 모임과 홍등가에서도 그녀와 똑같은 벅찬 가슴을 펴고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시아 출신의 여자들,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을 단 1초만 흘끗 스쳐 보기만 해도, 그들이 수진과 너무나 같다는 것을, 너무나 같은 이유로 떠나왔으며 너무나 같은 이유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손에 여권과 다른 한 손에 비행기 티켓을 움켜쥔 현대판 여전사들의 군대가 전 세계의 거미줄 같은 실시간 항공 노선을 따라 오만에 가득 찬 눈빛을 창처럼 앞세운 채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수진은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박살 내지 못하는 유람 부인에 머물고 말리라.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쓰지 못하리라. 사실 그녀는 여권과 티켓을 손에 움켜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며 자존심 상하게도 고향에서 송금까지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니던가. … 

p.251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이 나를 감동시켰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막대한 유산상속을 포기했고(그가 보통 일반적인 선으로 생각되는 대로 자신 몫의 유산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든지 하는 자선의 행위조차 피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공리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돈이 있어야 행복해지고 정신적 업적도 이룰 수 있다는 범속한 상식에도 반대한 듯이 보인다) 시골의 무지한 농부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진해서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문학이나 예술, 위대한 정신도 갖추지 못한 작고 가난한 마을 트라텐바흐의 교사로 간 일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 그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삶의 곤궁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교육을 좀 더 나은 삶의 수단으로 제공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학생들에게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그의 연인이자 천재 수학자 프랜시스를 기계공이 되게 했듯이 트라텐바흐에서는 농부의 아이들에게 정신의 진보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고 그는 트라텐바흐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만 받은 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생의 한가운데, 검은 당나귀 / 루이제 린저 

느림 / 쿤데라

가자에서 눈이 멀어 / 헉슬리

+ 요즘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 것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도대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