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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 2014년의 마지막 날과, 2015년의 첫날을 장례식장에서 보내고 있다. 과히 슬프지만은 않은 이곳에서 몸둘 바를 모르며 덕담 없는 새해를.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을 못 채우고 세상을 뜨셨다. 좋은 기억은커녕 곤란했던 기억뿐인 분이라 나는 무감하지만, 어느새 부모를 모두 보낸 엄마의 얼굴이 한층 늙어 보여 마음이 아프다.

손님 없는 정초의 한산한 장례식장에서 대기실과 빈소와 식당을 오갔다. 새해 첫 책은 <눈먼 자들의 국가>. 집에서 검은 옷과 함께 책을 서너권 챙겼지만 장례식장에서 읽을 만한 책은 이것뿐이었다. 사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은 곳곳에 산재하고, 우리를 구조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한 목소리로 말하는 글들을 읽다보니 2015년에는 그저 조금 더 안전한 나라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이제는 "부자 되세요"도 "행복하세요"도 아닌 "안전하세요" 즉 각자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지난주에 의식도 없던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후로 죽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맴돈다. 포기를 모르는 현대의학의 끝없는 연명치료의 공허함.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목숨>은 한 호스피스를 배경으로 한다. 산고의 고통이 7이라면 호스피스 환자의 통증은 9라고 한다. 이 끔찍한 통증 속에서 호스피스의 환자들은 얼만큼 명료한 정신으로 견딜 것인지, 즉 진통제의 투여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금 더 고통스럽더라도 또렷한 정신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수면 아래 잠기더라도 고통 없이 편안하게 마지막 시간들을 보낼 것인지. 그리고 환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각자가 삶을 살아온 방식과 놀랍게도 비슷하다고 한다.

팟캐스트에서 <목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엄마와 같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었다. 간병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핵가족의 병수발이 가져다주는 죄책감과 고됨. 외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그런 선택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기에 그런 제안을 하지는 못했다.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다. 호스피스에서 가족과 안정된 시간을 보내다가도 마지막으로 한번만 치료를 시도해보고 싶다며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것은 가족의 몫보다는 본인의 선택이어야 할 테니까. 스위스의 '조력 자살'에 대한 기사를 보며 생각한다. 앞으로는 이 나라에서도 삶의 방식의 반의 반만이라도 죽음의 방식이 다양해지길.


P.S. 이 쓰잘데없는 글을 스마트폰으로 끄적인 후에 한 대형병원에서 현직 외과의사로 있는 아버지의 친구분과 이야기를 나눴다(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와 친구분이 나누는 대화를 옆에 앉아 들었다). 실제로 할아버지의 병세가 나빠져 완화병동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병동이 턱없이 부족했다(할아버지 댁 근처에는 단 하나의 병동이 완화병동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침상은 열두개였다고 한다). 보호자나 환자 자신이 어느 단계에서 치료를 중단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병의 개선을 위한 치료가 연명치료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의사의 적절한 조언과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생각해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