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해당되는 글 67건

  1. 2011.07.21 110720 달려라 아비 / 김애란
  2. 2011.07.19 110719 잡년행진, 표백
  3. 2011.06.30 110629 Open Mic
  4. 2011.06.24 110624 김혜리 기자
  5. 2011.05.10 110510 좋은 음악, 1인칭 소설, 도시
  6. 2011.03.30 110330 ICP 전시 / The Mexican Suitcase & Wang QingSong
  7. 2011.03.26 110326 은희경

110720 달려라 아비 /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가 가장 좋았다. 짧은 서사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다니 엄청났다. 편의점 세 개를 이야기 했을 뿐인데. 

*

큐마트를 경영하는 부부는 사십대 후반이다. 아마도 그들은 지난 아이엠에프 때 명예퇴직금으로 큐마트를 연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관상이 온화했던 탓에 나는 내 추측을 확신했다. 그 나이에도 의심이 적고,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들이란 대개 그들을 부드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기를, 배반을, 착취를, 불평등을 모른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노력한 만큼 벌거나 노력한 것 이상으로 벌어온 사람들일 것이다. 모든 부드러움에는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 그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내가 그걸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이유는 그러고나면 내 처지가 덜 속상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순간 엘에이의 한인촌을 습격한 흑인과 닮아 있었다. 편의점에 가는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면서 흑인이다. 나는 그들을 폄하하는 대신, 그들의 환경을 덜 부러워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정직하므로 가난하고 그들은 부정직했으므로 풍족하다. 가치란 편의점의 물건과 같아서 그런 식으로도 교환될 수 있는 것이다. 

*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김애란 소설집 <달려라 아비> 중, 나는 편의점에 간다 -- 문학과 사회, 2003년 가을호


글은 강해야 한다고 썼던 건 작가가 확신을 가지고 쓴 글만이 나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류의 물결이라도 독자에게서 이끌어내기 위해선 확신에 찬 글이 필요하다. 




110719 잡년행진, 표백


*

벌써 7월 하순이야! 어휴. 시간 잘 간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잠이 깨서 좋다. 음식이 싱거우면 소금을 치면 좋다?

*

잡년행진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한숨이 푹푹.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피해자에게 “성추행으로 고소하면 한 남자의 인생이나 인격을 모두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봤느냐”고 묻는 검사도 있었다." 마음이 콕콕. 어이가 없어서. 왜 세상엔 상식이 통하지 않을까.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면 내 머리로는 풀 수 없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들도 많지만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상식도 통하지 않는 것도 보면. 가슴이 턱 막히고 답답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고. 세상에 화가 나고. 


*

"한 가지만 덧붙이자. 여러 사람이 죽는 소설이다. 한 인물이 죽을 때, 다른 인물들이 반드시 울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만큼은 몰래 울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의 차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청춘들을 향한 뜨거운 애정에서 출발했을 이 소설에서 그 울음소리가 희미하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 아쉬움을 굳이 감추지 않는 것이 내 환영의 방식이다. 논쟁적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55.html)


*

잘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부럽지만 내가 이 년 전에 썼던 일기를 복기하는 수밖에 없다. 계속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기사를 읽고 좋은 영화를 봐라. 음악을 듣고 노래를 해라. 걱정하지 말고,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 선택하고. 


 

110629 Open Mic


내가 오픈마이크에서 뭔갈 하는 건 싫지만, 뭐 어쨌든 좋은 행사다. 아무리 그 곳이 맘에 안 들어도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 이렇든 저렇든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다. Rob이 기타를 연주했다. 인간적으로는 맘에 안 들지만 잘 하는 건 인정해야겠다. 자작곡인듯 한 데, 가사가 괜찮았다 (as always, I didn't listen to all of 'em... still). 뭐 그래도 인정 해야겠다. '뉴욕'에서 공연도 하시고 글도 쓰시고 기타도 쫌 치시고 하시는 분이니. 그래. 쳇. 흥. 성격? chemistry?를 떠나서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Sudan에서 여기까지. How the hell?  

인간에 대한 이해가 참 부족하다고 생각했던게, 저 사람은 정말 왜 저럴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일본 아줌마/할머니를 보면서 참 기이한 사람이라고, 어떻게 50대, 영어도 못 해, 기타를 잘 치는 것도 아냐, 왜소한 몸에, 당신에겐 어떤 삶이 있었던 걸까? 왜 당신은 여기 있는 걸까? 정말 어떻게? 

김연수는 여기서 소설이 출발한다고 했지. 나도 출발하면 얼마나 좋을꼬 (ㅋㅋ) 이해한다면 나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 군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말을 지하철에서 약간 이해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왜 저 사람은 저런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 (진짜 진지하게). 정말 이해까지 할 순 없겠지만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지금은 사람을 대충 보면 stereotype화 해서 입력시키는 정도에서 그치는데, 그걸 넘어서는 사람이 나오면 당황한다. 내 분류체계에 맞지 않는 사람. 또한 사실 카테고리에 입력시킨 후에는 (사실 카테고리가 몇 개 없다. 맘에 드는 사람, so-so, 맘에 안 드는 사람.) 예를 들면 롭은 맘에 안 드는 카테고리에 속하고 샤넬이나 대닐은 so-so. 뭐 소수의 내 친구들은 맘에 드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분류한 다음에는 크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jerry같은 사람을 만나면 엄청 당황스러운거다. 뭐지 이 인간은? (ㅋㅋ)

흑인 아줌마/Jonesy를 보면서 comedy와 profanity의 경계. 흠. 저급하면 웃길 확률이 크긴 하지만 그저 offending할 수도 있다. 실제로 Jonesy에게는 Dude, you're hilarious but you're in a wrong place for that joke라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이것도 위로라고. 사실 뭐 엄청 clever한 comedy는 아니었지만. 흠. 한 명은 모두들 안 쓰는 척 하는 profanity를 건드림으로써 사람들을 엮는 것 같다고도 이야기 했는데. 뭐 맞는 말도 약간 있긴 한데... 사실 어느 정도까지가 웃긴거고 어디서부터 그냥 저질이 되는 건가. Oh what, now the joke's offensive? 사실 관객의 한 명을 표적으로 삼고 웃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턴 좀 불편해진다. 저 사람이 저걸 얼마나 웃어 넘길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크리스티와 내가 항상 싸우는 지점이 어디까지 희화화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하는 질문인데. 음. 아 그리고 마지막 흑인 남자는 그저 offensive했을 뿐. 그리고 집에 가면서 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가는 걸 보고 내가 그들을 몰랐다면 정말 짜증난다고만 생각했을 텐데. 음. 

그러니까 사람은 대단하다고? not that. 내가 얼마나 stereotype에 갇혀있는지 깨달으면 정말 깜짝 놀란다. 사실 Jonesy같은 사람을 실제로 만났다면 뭐야 쟤 무서웡 하고 피했을텐데. 내가 약자라는 자의식 또한 나를 견제하는 것 같다. 

insight을 나누겠다는 사람을 보면 어이없ㅋ엉ㅋ했지만 뭐 그렇게 배배 꼬여서 볼 것만도 아니다. 쩝. 

Jerry를 보면 항상 마음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나쁜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너무 순수해서. 매번 그의 모놀로그나 뭐 갖가지 bits를 보면서 감탄한다. 그리고 이 인간도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꼭 그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파란 눈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 눈이 내가 얼마나 속물인지, 썩었는지, 진정성이 모자란지 깨닫게 해준다. 절대 날카로운 방법이 아닌 정말 고맙습니다! 하는 눈빛?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진심으로 믿음을 가진 눈빛이라서 더 그렇다. 내가 해 준 짧은 조언에 정말 고맙다는 그에게 나는 하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그 조언을 할 때도 나는 진심이었지만 부끄러워서 casual하게 말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만큼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걸 부끄러워/어려워 하는 나다. 또한 주위에서 그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아서 몹시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을 아무도 appreciate해주지 않고, 사실 시나리오 하나를 써 낼만큼 dexterity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면서, 이혼(당)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의 열정을 놓지 않은, (물론 그는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더욱 대단하다.) 사람인데. mopping이나 시키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는 게 할 수 있는 다이고, 조직에다 얘기를 하고 싶은 심정인데. 여기서 나의 소시민적인 면을 마주하면서 더 부끄러워진다. 

또 생각한 건, 여기서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에 팔 걷고 얘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서도 얘기할 수 없을 거라는 거다. 이걸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매우 겁이 나는데, 그건 이걸 인정함으로써 내가 엄청나게 못난 놈이 되기 때문이긴 하다. 정말 잃을 것이 없는 지금도 옳지 않다는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지금은 못 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정말 잃을 것이 생긴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대답해라 최지수.

또한 제리가 쓴 모놀로그를 보면서 생각한 것. 한 단락을 써도 world가 그 안에 존재하는 것. 약간의 익살은 필수. 완결된 구조라는게 느껴졌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 단락을 써도 세상을 담고 싶다. Moral을 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한다. 뻔한 교훈을 담는게 아니고 음. 뭐를 표현해야 하는 걸까? 


아. 그리고 좋은 사진 한 장을 찍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열 장을 찍어내는 게 어려운 거다. 는 말처럼. 좋은 음악 10. 좋은 영상 10. 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영화는 좀 예외인 듯 싶다만)

110624 김혜리 기자

김혜리 기자님 엉엉엉 김연수님 흐억.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2007&article_id=59962

누구보다 언어의 가능성을 신봉하는 사람이 작가고, 시네마의 힘을 믿는 사람이 영화감독이라고 우리는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 역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구가 가진 결함과 연약함을 누구보다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들의 일이란 어쩌면 그 불완전함의 굴곡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도달불능점을 기어코 손으로 감촉하는 일이 이 세계에서 그나마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임을 수긍하고 실천한다. 궁극적으로 실패함으로써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을 증명한다. 거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무용한 아름다움이다.

그렇다. 어떤 한 장르의 가장 큰 한계는 그 장르를 규정하는 도구(문자, 영상, 소리)이고 어떠한 작품이 가장 빛날 때는 그 한계를 가장 빛나게 드러냈을 때이다. (“어떠한 형식을 통한 예술이건간에 그 예술이 가장 빛날 때는 그 형식의 ‘제약’을 반대로 이용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역사소설을 쓸 때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하십니다. 고증에서 상상력으로 갈아타는 지점을 어떻게 정하세요?
=상상력 자체가 자료에 기초해요. 자료로 더이상 알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자료를 보죠. <꾿빠이 이상> 같은 경우 마지막 순간에 이상이 갖고 있었던 마음이 가장 중요한데 그건 자료가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에요. 그 부분을 제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읽는 이들이 자료로 써진 부분을 읽으면서 유추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게 제가 한 작업이었어요. 그게 인문학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어떤 진실의 순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쓰지 못해요. 방계의 정황들로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으면 제일 좋다고 생각하죠.

예컨대 1940년에 태어나 60년에 대학 들어간 인물을 쓴다면 그 무렵 그가 읽었을 법한 책을 무작위로 읽어 그의 교양수준, 접했던 어휘, 감각적으로 노출됐던 폭력, 인식의 지평을 체화해야 해요. 그렇게 인물의 상태를 파악한 다음, 극적인 상황에 던져놓아야 고유한 행동이 나와요.

110510 좋은 음악, 1인칭 소설, 도시

*결국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안’ 중요한가?


도대체 무엇이 음악을 좋은 음악으로 만드는 걸까?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음악. 음악은 참 timeless하다. 아니, 아니지. timeless한 것이 좋은 것인가? time과 떨어져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세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라디오헤드를 아직도 듣냐고? 그럼 넌 비틀즈를, 모짜르트를 아직도 듣니. 아니 그러니까, 그래서 좋은 음악은 어떻게 좋은 음악이 되는 걸까. 가사를 듣지 않던 내가 가사를 듣기 시작하며 더 좋아지는 곡들이 생겼다. 반면 가사따위 귀엔 들리지도 않는 곡들이 있다. 내겐 대부분이지만. 음. 원칙주의 . 엄격. 작품주의. 무언가를 해석할때 내부의 기준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 을 내가 갖고 있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 신경쓰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이거라고 핑계댈수도 있겠다. 그런 설명에 콧방귀를 뀐것도 그런 건방진 마음에서 나온거 하하하

 *
“젊은 시절엔 결코 1인칭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말한 소설가가 있다. 소설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엔 결코 자전적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게 좀더 정확한 인용인 것이다. 어쨌거나 ‘젊은 시절엔 스스로와 심리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자신의
직업·취향·계급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사물·세상을 최대한 많이 겪고 그것에 대해 쓰겠다’는 결의로 나는 해석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920.html)
 

110330 ICP 전시 / The Mexican Suitcase & Wang QingSong

ICP 전시 / The Mexican Suitcase & Wang QingSong

왕칭송 재밌었다. 멕시칸 수트케이스는 공부하는 기분으로… 라기보다는 좋아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시달려서 봤달까. 그 유명한 카파와 타로의 작품이고, 스페인 내전이고, 알아야 하는데 모르는 것이고. 하하하하하하 병신. 나중에 갤러리 톡을 들으면서 난 왜 저런 생각을 보고 바로 못했나 배경지식이 없으니 뭐 생각할것도 없겠지만 엉엉. 카파의 스타일, 타로의 스타일, chim의 스타일을 알 만큼 사진을 본 건 아니니까.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일단 다큐멘터리 사진은 ‘형식’보다는 ‘대상’이 중요한게지. 음.음.음. 보면서는 사진의 이점보다는 사진의 한계가 더 잘 보였다. 다큐멘터리 사진으로써의 한계. 노력하지 않는 수용자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내가 보기엔 아무리 해도 보조적인 수단이 될 수 밖에 없고, 글이 수반하지 않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무엇을 전할 수 있나? 한컷으로 모든 말을 전하기엔 너무나 모자라다. 그 사진이 어디서 찍혔건 알게 뭔가. 결정적으로 다큐멘터리 사진(만)이 할수 있는게 뭔가?

반면, 왕칭송은 전-혀 기대 안 하고 그냥 내려갔는데 처음 몇 작품 보고 뭐야 이게. 했는데 의외로 압도 당하는 경우였다. Night Revels of Lao Li (스크롤 따라한거)는 처음에 보고 아 뭐야 이새키 그냥 또 다른 변태네. 했지만 역시 ‘설명’을 들어야 이해가 되는. 하이컨텍스트일 수밖에 없는 사진/그림을 노력 없이 보려니 그냥 그렇게 지나가시는거져 최지수님.

그것보다 더 흥미로웠 이미지가 압도적이었던 작품은 Follow Me. 그 다음에 Competition, 그리고 그냥 이미지적으로 충격적이었던 Dormitory. set-up된 포토그라피의 극치를 거의 보여주는 것 같다.

베이징에서 활동한다길래 약간 걱정이 되어서 ‘중국에서 이 작가 괜찮냐 - 검열 당하거나 그런 거’라고 물었더니 음. 어쨌든 이 사람은 state를 challenge하는게 아니라서 괜찮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일단 충격적이면 억압당할거라고 가정하고 보는 멍청한 머리 ^^) 이미지는 충격적이고 거대하고 (사진에 있어서 magnitude의 중요성) 그렇지만 보면 decadent western consumerism을 까면 깠지 억압적인 중국 정부를 까는게 아니니. 그러니까 더 한계가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매혹적인 색감과 센세이션한 설정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그런 심정인듯. 니가 중국에서 그거를 하고 있는게 말이 되냐… 딴거 싸울게 많이 있는데… 이런 논리 싫어하지만 이런 억하심정이 드는 건 막기가 약간 힘들군여 ㅠ

 

110326 은희경

술 먹고 글 쓰는거 재밌는데? 허허허. 반쯤은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생각들. 말로 뱉는 것보다 문자로 뱉어놓고 읽어보니 낯설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이거 좀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걸요. 허허허.

오늘 아침 술이 덜 깬 빈 속으로 회사를 향해 오는 길, 여전히 은희경 책을 읽고 있었다. 읽으면서 든 생각. 아니 이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결국 소설은 모두,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아닌가. 그래서 메모:

소설은 결국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를 허구의 세계와 인물을 통해서 하는 거구나. 이 교과서 같은 지루한 문장이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질 때까지. 하하 그전에 교과서를 떠올리는 나도 웃김. 그게 마냥 진리인냥. 그래서 겁쟁이들이 쓰는 건지도 모른다고 했구나. 김영하가 정이현씨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작가가 된 건지도 모른다고 했을때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래 결국에 하고픈 이야기를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 하는거지, 문학은. 그래. West 4th부터 23가까지에서. 앗 도착.

역시 교과서쟁일 못 벗어난다. 교과서를 삼독하라는 뭐 그런 이야기 정석을 여덟번 돌리라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 말야. 하지만 그렇다. 거기 교과서에 들어가려면 누군가가 이 생각을 했던거 아니야?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동의 했으니까 그랬겠지. 어쨌든 무미건조한 국어 교과서의 질문이 아닌 내가 체화하게 되다니, 이런 순간순간이 지독하게 행복하다. 그래서 감사하다.

은희경은, 우리를 나누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걸까. 소설 ‘빨리’ 읽고 싶어하기로는 내가 또 대단하지. 휘리릭 휘리릭 빨리 넘기고 싶은 마음에.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이후에 그를 통해서 이야기한다니. 작가들을 새삼 존경 존경 또 존경. 나도 하고 싶다. 나도 할 수 있을까.

인물이 먼저인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인지, 둘 중 무엇이 먼저든 중요하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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