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문자'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3.10.02 최금진 - 착한사람
  2. 2013.09.22 테드 창 인터뷰 번역
  3. 2013.09.17 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4. 2013.09.10 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5. 2013.09.09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6. 2013.09.07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7. 2013.07.23 앤드류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8. 2013.07.23 130722 한윤형, 박해천
  9. 2013.02.21 김사과, 금정연, 신형철
  10. 2013.01.10 발레리 줄레조 Valérie Gelézeau, <아파트 공화국>

최금진 - 착한사람

팟캐스트 듣다가. 시가 너무 좋아서 받아적었다. (원문 시작 2012 겨울호 수록)

아 이 시인 멋있는 사람이구나


*


최금진/ 착한 사람


나는 착한 사람, 앞으로도 목적 없이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종착점 같은 것은 없다

도피중인 사람들은 나를 대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고

권위적인 사람들은 내가 의자로 보일 것이다

대화와 소통은 미개한 짓, 나를 도구로 사용한 흔적이 당신의 

손에 돌도끼처럼 들려져 있지 않은가

한때 시간을 주머니에 넣어서 다닌 적도 있었지만

누구를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 몰래 버리기 위해서였다

투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담배도 피지 않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흉보고, 욕하고, 비난하면서

변명과 복수들을 차곡차곡 지폐처럼 모아

배를 한 척 사고, 진화의 역방향 쪽으로 배를 몰고 가겠다

주말엔 텔레비전을 보고, 될수록 잠을 많이 자고

제발, 나를 내버려두라고, 그런 요구조차 안하고

이불 속에서, 늙은 쥐처럼 눈 오는 창밖을 멀뚱히 훔쳐보고

책도 한 줄 읽지 않고, 무식하게, 형편없게, 무기력하게 

학술회에서, 강연회에서, 술자리에, 몰래 빠져나온 사람처럼 

늙어 갈 것이다, 어떤 참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날 사랑한다면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도둑질도 하지 않을 것이, 카드 빚도 갚지 않을 것이다

미친놈, 샌님, 또라이, 비관주의자, 암사내, 집짐승, 퇴보, 퇴보

나는 당신들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른 체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나는 끝내 당신들의 살의를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



테드 창 인터뷰 번역

http://aalrmag.org/specfictioninterviewchiang/


여튼 연휴에 잠만 잔 기념으로 테드 창 인터뷰라도 하고 연휴를 내일로 마감해볼까 한다. 흐흑. 너무 길어서 전문을 다 하긴 무리고 재밌는 부분만 복붙 + 일부 번역. 


BH: SF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왜 SF 소설을 쓰는지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TC: 제가 SF소설을 쓰는 이유는 이 장르가 진행 중인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한 작품은 이전 작품에 대한 대답이지요. 제가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대화가 SF장르라고 할 수 있죠. (번역이 맘에 안 들어서;)

(위에서 언급한) 작년 여름 Clarion(UC 샌디에고에서 열리는 SF소설 워크샵-옮긴이 주)에서 수업을 한 후에 한국에서 열린 과학기술 컨퍼런스에 SF에 대해 강의를 하기 위해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컨퍼런스에서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SF라는 장르가 세간의 인식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것이었죠. 대다수 사람들의 SF에 대한 인식은 할리우드 영화에 의해 형성돼서, 보통은 SF가 특수효과 위주의, 선과 악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느 사람들만큼 선악 대결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SF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선악 구도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적/공간적 배경에서도 찾을 수 있죠. 배경이 미래이거나 로봇이 등장한다고 SF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SF가 산업혁명 이후의 스토리텔링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학평론가들은 선악 구도의 이야기의 도식을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로운 세계에 악의 세력들이 침입하고, 주인공들이 맞서 싸우고,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고 세계는 다시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구조라고요. 평론가들은 이것이 궁극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수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구도는 범죄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질서에 약간의 분열이 생기지만 결국 질서를 되찾죠. 

SF는 다른 구도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야기는 익숙한 세계가 새로운 발견이나 기술 때문에 변화를 겪는 것에서 시작하죠. 이야기가 끝날 쯤에 세계는 영구적으로 변화해버립니다. 원래의 상태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아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에 숨겨진 메시지는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변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결국 이런 이야기 구조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발견이나 기술의 결과들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우리는 그것을 대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런 것이 전형적인 SF의 줄거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죠.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이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살아생전에 세계가 변화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요. 산업혁명 이후에야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변화하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죠. 이게 제가 SF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고,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만 SF를 아는, SF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SF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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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중단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의 원문 전문은 여기(http://subterraneanpress.com/magazine/fall_2010/fiction_the_lifecycle_of_software_objects_by_ted_chiang)에서 볼 수 있다. 알고보니 Subterranean Magazine라는 잡지는 장르문학 계간지인 모양인데, 계간지에 수록된 소설들의 원문을 제한 없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고 있다. 장르문학에 주력해 1995년 시작한 이 회사는 콜렉터스 에디션 등을 만들어서 서브컬쳐계(?)에서는 꽤나 알려진 모양. 스티븐 킹 등 유명 작가 작품을 냈다고 메인에서 자랑하고 있다. -.- 이런 회사가 거의 20년간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보니 역시 덕 중의 덕은 양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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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서 나머지는 못허겄다-_-

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 봄에 읽던 책이라 좀 낡긴 했지만, 정리하는 데 의의를 두고. 서해문집에서 2010년 출간됐다. 역자는 차미례 선생.




저자 소개는 눈여겨 볼 만한 구석들이 있다. 저자 테렌스 데 프레(Terrence Des Pres)는 위키피디아에 무려 'Holocaust scholar'라고 소개되어 있다.  책날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1987년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아주 건조한 부고에는 사고사(accidental death)라고 쓰여 있다(여담이지만 부고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OOO is survived by ...'라는 표현은 참 애잔하고 귀엽다). 속단할 필요는 없지만 프리모 레비를 비롯한 많은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어찌 되었든 학술서인 터라 생각보다 크게 알려진 책은 아니다. 1976년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놀라운 점은 역자가 이 책을 출간연도인 76년를 포함해서 세번이나 번역한 셈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포함해 곰브리치, 테리 이글턴 등을 번역한 훌륭한 역자인 데다 50년대생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대에 여성으로 신문사 국장, 논설위원까지 한 것을 보고 후덜덜. 여튼 역자 서문도 굉장히 흥미롭고 신뢰가 간다.)

몇달 전에 이 책을 읽을 땐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홀로코스트 관련 책들을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었는데 또 바로바로 정리를 해두질 않으니... 직접인용된 문헌들의 목록은 책 뒤에 수록되어 있다.

71p
트레블링카의 집단 강제수용소는 실적이 좋은 날이면 하루에 1만 5000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처형되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살육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한 데다, 전쟁의 끝 무렵에는 SS(나치 독일의 친위대)도 이 같은 잔학상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시체를 매장했던 큰 구덩이들을 다시 파서 반쯤 썩은 시체들을 모조리 태워 없애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존더 코만도'라고 불리는 수백명의 죄수들을 동원해서 행해졌다. 

72p
<나의 동료들은 어디로?>(Where are my brothers?)에서 사라 베르코위츠(Sarah Berkowitz)는 조그만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밤, 바라크에서 자고 있던 죄수들 가운데 한 소녀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유도 모르게 몇만명이나 되는, 수용소 안에 있는 재소자 전원이 함께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88p
19세기 중엽 이래로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우월, 정신적인 깊이, 인간의 감성과 안식을 고도로 순화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생각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나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본다.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고통을 통한 구원, 키르케고르가 절망을 특히 강조한 점, 니체가 인간의 나락을 강조한 것,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억압받고 짓눌린 자들을 치켜세운 것 등이 그 원인이 아닐까?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처럼 다양하지만 사실 그 결과는 단순하다. 어떤 인간의 고통이 크며 클수록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돋보이며, 더욱더 진실해진다. 그러고 나서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황금 같은 가치를 갖게 될 때에, 그 개인의 상처와 아픔은 훨씬 더 견디기 쉬워지는 것이다. ...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고통에 대한 선망 같은 게 있다. 이것은 교육을 받을수록 더 크게 느끼는 것이며, 역사가 우리의 고통을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는 아깝고 속상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고통에다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선택받은 행복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생존자의 문학을 통해서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테마는, 고통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그처럼 광범위하고 거대한 고통은 전래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98-101p
살아남는다는 행위는 생존자 자신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가치를 지님에 틀림없다. 한라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체주의 정권이 자신의 모든 악행의 기록을 사라지게 할 망각의 심연을 만들기에 급급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나치가 화장, 묘지에서 파낸 시체 태우기, 서류소각, 폭파, 화염방사기나 인골분쇄기계를 총동원해서 1942년 6월부터 계속했던 광적인 증거 인멸 작업은 실패로 끝났다. '고요한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게 하는 일'은 허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망각의 심연이란 없다. 인간사에서 완벽한 것은 드물다. 더욱이 이 세상에는 망각을 가능하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서 진실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러한 한 사람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예컨대 1915년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말살하려는 고의적인 정책으로 100만명이 도륙을 당했다. 도시마다 조직적인 학살이 이어졌고, 농촌 마을은 불탔고, 수많은 남녀와 어린이들은 사막으로 쫓겨나서 굶어 죽었다. 그런데 이 참혹한 사건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히틀러가 그의 참모들에게 유태인 대량학살의 구상을 제의했을 때, 세계의 양심을 무마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은 "결국 오늘에 와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가공할 만한 파괴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이 삶보다 더 강하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우리 시대의 힘의 논리인 것이다. 
... 
생존자들은 자기의 죄의식이든 타인들의 죄의식이든, 그것을 정죄하기 위해 증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악에 대한 객관적 응징을 위해서 증언대에 선다. ...그 증언들이 기록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 이러한 책들은 인류의 영웅주의가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증거다. 

118p-
우리는 집단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의 모습이나 냄새를 쉽사리 간과한다. ... 결과적으로 수용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간의 큰 반발심과 혐오감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그런 사실들을 기억한다면, 나치의 냄새나는 책략이 그렇지 않아도 촉발되기 쉬운 수용자들 간의 반감을 조장하거나 서로의 혐오감을 키워 연대감을 말살시키는 데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 자신이 인간 이하라는 자각을 하도록 강요받은 것이다. 반면에 SS 대원들은 그들의 총과 당당한 위품 때문만이 아니라 수용자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오물로부터 말끔하게 격리된 세계에 서 있기 때문에 훨씬 우월한 인간으로 돋보이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수용자들은 일부러 고안된 오물의 진창길을 다녀야 했다. 깨끗한 도로는 SS대원들의 전용물이었다. 
왜 그토록 비참하게 수용자들을 학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왜 그런 동물 이하의 상태에까지 인간들을 몰아넣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정곡을 찌른 해답은 "SS대원들의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희생자들이 도저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천하고 더러운 몰골을 하고 있을수록, 학살자들은 인간을 대량 살육한다는 공포감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타 세레니 인용)

한나 아렌트는 1974년 뉴욕의 강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죽이기가 쉽고, 개보다는 쥐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 쉬우며, 벌레 가은 것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문제는 시선, 눈동자이다."

122p-
어떤 여자든 세수를 할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거나, 신발 끈 매는 것을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생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 바이스(Weiss)

몸을 씻는다는 것은 건강상의 이유로 씻는 것과는 별개의 형식적 의미의 행동이라도, 수용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임을 알았다. 이를 중단한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죽는 것이었다.

4시30분이면 커피-아무 영양가도 없이 고약한 냄새만 나는 엷게 우려낸 향료-가 배급되었다. 우리는 흔히 두어모금만 마시고 나머지로 세수를 하곤 했는데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보잘것없는 커피조차 안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씻기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덤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씻는 데 실패한 사람은 곧 죽는다. 이것은 철칙이었다. ...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는, 틀림없는 전조였다.

힘들어서 더이상은 못 옮기겠는데-_- 전체적으로는 3장 <배설물의 공격>과 5장 <죽음 속의 삶>이 가장 인상 깊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정리를 한번...


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흠모하는 테드 창 오빠야의 중편이 새로 번역돼서 재빨리 입수했다(출판사도 요즘 그 핫하다는 북스피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처음 몇십페이지는 정말 가슴이 둑흔둑흔대서 빨리 읽고 싶으나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깝고 앞의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어서(읽는 와중에도!) 뒤적뒤적대면서 아끼고 아껴 읽었음. 


-영화제 기간 중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변화는 불가피하며, SF는 좋든 나쁘든 변화한 상태를 살피는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변화를 멈추고자 하는 노력은 항상 실패했다. 예를 들어 개인·국가 단위에서 체세포 복제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새것이 항상 좋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필수불가결한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옛것과 새것 사이에 무엇이 나은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경향신문 인터뷰 중)

테드 창은 여기서 SF란 장르의 특색으로 '시작과는 곳과는 다른 곳에서 결론이 맺어지는 것', 즉 '새로운 기술로 인해 세계는 변화하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꼽았다. 이는 판타지의 일반적 '패턴'과 다르다. 판타지에선 평화로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악의 세력'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이에 맞서 승리함으로서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즉 현상유지란 측면에서 "기존의 것이 좋았다"라는 보수적인 정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반면 SF의 패턴은 '익숙한 세상에 새 기술이 나와 세상은 변화하고 그 결과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그 두가지가 공존할 수도 있지만, 어쨌듯 과거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다"라는 진보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 즉 "SF는 변화의 문학"이라고 강조한다. 

(http://blog.ohmynews.com/staright/160563)



테드 창 검색질하다가 나온 인터뷰 중에 이런 내용이 인상이 깊어서 더 자세하게 뭐 없나 해서 영어로 검색을 해보니 긴 인터뷰가 있었다. 


 I make science fiction my home because it’s been said that a genre is an ongoing conversation, one where novels and stories are responses to previous works. And in that sense, science fiction is a conversation that I continue to pay attention to, and that I want to participate in.


Shortly after teaching Clarion last summer I attended a science and technology conference in South Korea, where I’d been invited to speak about science fiction. One of the things I talked about was how my sense of science fiction differs from the popular conception of it. I think most people’s ideas of science fiction are formed by Hollywood movies, so they think most science fiction is a special effects-driven story revolving around a battle between good and evil, or something along those lines. While I like a story of good versus evil as much as the next guy, I don’t think of that as a science fiction story. You can tell a good-versus-evil story in any time period and in any setting. Setting it in the future and adding robots to it doesn’t make it a science fiction story.


I think science fiction is fundamentally a post-industrial revolution form of storytelling. Some literary critics have noted that the good-versus-evil story follows a pattern where the world starts out as a good place, evil intrudes, the heroes fight and eventually defeat evil, and the world goes back to being a good place. Those critics have said that this is fundamentally a conservative storyline because it’s about maintaining the status quo. This is a common story pattern in crime fiction, too—there’s some disruption to the order, but eventually order is restored.


Science fiction offers a different kind of story, a story where the world starts out as recognizable and familiar but is disrupted or changed by some new discovery or technology. At the end of the story, the world is changed permanently. The original condition is never restored. And so in this sense, this story pattern is progressive because its underlying message is not that you should maintain the status quo, but that change is inevitable. The consequences of this new discovery or technology—whether they’re positive or negative—are here to stay and we’ll have to deal with them.


This is a quintessentially science fiction storyline and it makes sense only in the wake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To a pre-industrial society, this kind of story would be incomprehensible, because no one had ever seen the world change in their lifetime. After the industrial revolution, we understand this story because we’ve all seen the world change. That’s what I think is at the heart of science fiction and what I usually tell people who aren’t familiar with it, whose ideas are mostly informed by Hollywood.


안 귀찮으면 번역을 해놓겠음. 혜리 언니 영화의 일기에 "휴가에 할 일에 OOO번역을 추가했다"는 문장을 보고는 또 역시 언니는 무용한 일을 참 잘해. 라며 감탄했사옵니다.


그러타 나의 올해 목표는 무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정작 책 내용에 대해선 그다지 코멘트할 것이 없고, 여러번 읽어도 충분히 좋을 책이다. 사실 장르문학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좋아하는 SF 작가라고는 테드 창과 배명훈 정도가 다이지만 벌써 홀라당 넘어가서는, '장르문학'이라는 꼬리표에 붙는 소위 순문학 애호가들의 의심스러운 눈길따윈 콧방귀로 물리칠 준비가 되었다! (읭?)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2~3년 전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이란 생각을 했다. 한창 삶삶삶 타령을 할 때 읽었으면 아주 좋아서 미쳤을 것 같다. (전혜린 에세이도 아마 비슷한 계열일 거라는 느낌이 든다. 엄마 고등학교 시절에 전혜린 열풍이 불어서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의 인기가 치솟았고 더불어 루이제 린저의 소설도 열독되었다고 한다. 그 시대의 문학 소녀들의 분위기가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이고 아주 그냥...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야자와 문제집에 찌들어 있었다는 게 정말 안타깝다. 책과 영화를 친구들과 공유하던 풍습(?)은 거의 열세살 무렵에 마무리가 되었다-_-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라오스 여행에서 체력이 떨어갈 때쯤 읽었다. 귀퉁이를 접어놨던 모든 페이지를 옮기긴 어렵고 일부만 발췌한다. 


가장 임팩트 있었던 부분은 두군데인데, 극중의 니나가 쓴 유대인 수용소에서 하루 아침에 석방된 이들에 관한 짧은 소설(전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과 니나가 안락사에 대해 경멸을 숨기지 않고 상대의 논리를 논파하는 부분이다. 


197p

B교수는 조심스런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인간 생명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형법은 사형을 허용하고 있고 국제법은 전쟁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법률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런 법률이 없다. 이 말은 강의 시간에는 조용히 받아들여졌으나 나중에 격렬한 토론을 유발했다. 학생 중 하나가 그런 법률은 이미 독일 민족이 나약한 휴머니즘의 견해에 반대해 강자의 지배를 옹호할 때부터 있었다고 주장했다. ... 이때 다른 여학생 하나가 한 무리의 짐승을 역병에서 구하려면 병든 짐승들은 죽여도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토론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

니나의 편이 되어서 싸운 두세명의 학생들은 완치될 수 없는 정신병자가 아직 인간인지 이미 인간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치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며, 오진의 가능성도 있고, 치료 방법이 개발될 수도 있으며, 여태까지 불치로 간주되었던 질병도 고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니나가 정신병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없으며, 불치의 병자이면서도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반면에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고 말했다. 이에 누군가가 나서서 그렇다면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인간도 제거시켜야 한다, 국민은 이들과 정신병자를 희생시켜야 한다, 고 말했다. 이때 니나는 소리쳤다. 그럼 당신은 횔덜린도 죽였겠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니나는 완전히 자제력을 상실하여 복도까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질렀다. 생과 사를 결정하는 재판관은 누가 됩니까?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살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당신 같은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재판관이 되겠죠. 그리고 그들은 법이라는 미명하에 한번 죽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옳든 그르든 상관 않고 계속 죽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살인자들만 남겠지요. 나는 이에 반대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살인을 허가하고 그 살인에 불가피함과 선이라는 딱지까지 부여하는 국가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233p

니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자신도 말을 해놓고 놀랐다. 그럴 것이 전에는 이런 수상한 시대에는 자식이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는 마흔여덟이다. 



극중 니나의 생애는 작가 루이제 린저의 생애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나치에 맞서 저항해 투옥되고 저서들이 금지되고... 뭐 그런 삶을 살았음. 전후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산문 작가이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함께 현대 여성계의 양대산맥이라는데 음 ㅎ_ㅎ


1911년 태어나 2002년 사망했고(무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니! 민음사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 놀라움.) 혹시나 우연히 옆에 책이 있던 제발트와 동시대 인물일까 해서 찾아봤더니 제발트는 1944~2001. 더 늦게 태어나 더 일찍 죽었구먼요.


생의 한가운데는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었고(퍼블릭 도메인은 작가 사후 50년(2013년부터 70년으로 연장)이니 아마 다들 7~80년대에 나온 해적판이지 싶다. 1950년에 쓰인 작품이니 무려 마흔 전에 썼다는 이야기이구먼요. 


전체적으로 인상적이고 좋긴 했는데 음; 요즘 나를 뒤흔드는 류의 소설은 아니라서 별다른 코멘트를 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놈의 '삶타령'(꼭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고)은 이미 스스로 지겹도록 읽고 듣고 보고 늘어놓은 터라 이제 조금 나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게 꼭 순간순간의 '격정'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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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발간된 그녀의 전기는 그녀가 젊은 나치 지지자로 나치를 위해 영화 대본을 썼다고 밝혀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나는 되려 루이제 린저의 글로 미루어 그 당시에 나치의 선전에 '잠시' 넘어갔던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더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도 이런 과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10)


<당신과 원자탄>

(1945년 10월 <트리뷴>지에 게재. 히로시마 원폭 1945년 8월 6일 두달여 뒤에 발표한 글)


원자탄의 발명은 역사를 역전시키기는커녕 지난 10여년 동안 명백해 보였던 추세를 강화할 뿐이다.(210p, paraphrased)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 가장 강력한 무기가 싸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210p)


우리 앞에는 몇초만에 수백만명을 없애버릴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가공할 초강대국 두셋이 세계를 나눠가질 전망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전망은 전쟁이 점점 더 커지고 끔찍해짐에 따라 기계문명이 종말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식의 다소 성급한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만일 강대국들이 서로에겐 절대 원자탄을 쓰지 않기로 암묵적인 동의를(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한다면? 보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쓰거나 쓴다는 위협을 한다면? 그럴 경우 우리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권력이 더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피지배 민족들과 피억압 계급들의 미래는 더 암담해진다는 것뿐이다.(212p)


원자탄은 피착취계층과 민족의 저항능력을 전부 빼앗아버리는 동시에 그것을 보유한 자들을 군사적으로 대등하게 해줌으로써 그런과정을 완수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를 정복할 수 없기에 그들끼리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해나갈 것이며, 더디고 예측하기 힘든 인구통계학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균형이 어떻게 깨질지 알기 힘들다. (...) 우리는 전반적인 와해가 아니라 고대 노예제국처럼 끔찍하게 안정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비확산조약이 아니면 무엇이겠능가=_= NPT(Non-proliferation Treaty)는 이 글이 쓰인 지 20년 후인 1968년 서명되어 70년에 발효되었다. 95년 가입국은 190개국으로 증가했고 현재 핵을 가진 국가는 유엔 안보리 멤버와 동일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이다. NPT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는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남수단뿐이고 북한은 2003년 철회했다. 이런 거 보면 외교론에서 현실주의의 힘을 실감함. 웨스트윙 봐도 마찬가지고. 엄청난 성취라고 자랑스러워 했겠지만 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미약한, 그러나 현실적인 조치인가. 어찌되었건 핵 보유국에서 반핵(무기)운동의 논리를 성공적으로 전유해 이런 차별적 조약을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다른 분야에서 시민운동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기성 정치에 이용당할 수 있는지도 생각이 난다.


별 관계는 없지만 후쿠시마 이후로 독일이 탈원전 선언을 했었는데 (그외에 몇국가 더 있었나? 기억이 안 남.)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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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어딘가 '하루키 산문스러운' 에세이로 자기가 이상으로 그리는 펍을 묘사하는 <물속의 달>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매우매우 귀여운 글이었다. 이 에세이의 영향으로 영국에는 "물속의 달"이란 상호를 쓰는 펍이 많다는데 영국에 700여개 펍 체인을 거느린 Whetherspoon도 이 글에 착안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함. (1호점 이름이 '물속의 달') (이런 정보들은 이 책 역주에 깨알같이 적혀있는데 역주가 살짝 과도하게 친절한 경향은 있지만 대체로 훌륭한 정보들이다. 편집이 매우 잘된 책이라고 생각함.)


웨더스푼 1호점인 'The Moon Under Water"는 맨체스터에 위치해 있고 이렇게 생겼음.



아이고 영국의 펍이여- I never liked pubs. 뉴캐슬에 처음 갔을 때는 대체 이 인간들은 밥을 어디서 먹는 건지 대체 레스토랑이 보이질 않아서 답답했었다. 보통 펍에서 간단히 해결한단 걸 알고 얼마나 기함을 했던지! 그 기름지고 맛없는 펍 음식. 아. 펍의 문제가 아니라 영국 음식의 문제인가. 영국에서 내가 유일하게 '맛있다'고 느낀 집은 뉴캐슬 굴다리(?) 밑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는데, King Prawn Pasta가 매우매우 신선하고 맛있었다. 그러나 어째 다음번 찾아갔을 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새 주방장이 바뀐 겐가. 


여튼 지나가면서 물속의 달이라는 펍을 보지 않았을까 했는데 구글맵에서 검색을 해보니 역시 멋없는 북부에는 없고 맨체스터에 한두개와 런던에 대여섯개가 몰려 있다. 그나저나 이름만 같으면 뭐 하나. 오웰 오빠는 요구 조건이 너무 많으셔서 이런 펍이 정말 있기는 힘들겠구랴. 


<정치와 영어>라는 에세이는 귀찮아서 안 읽었지만 영문과에서 꼭 읽고 넘어가는 글이라고 해서 흥미가 도로 생겼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튼 이 책에서 가장 폼나는 글은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문장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하며, 충실성의 문제가 새롭게 개입된다. 보다 투박한 유형의 어려움이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이 책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 따위가 가득한 긴 장章이 있다. 이와 같은 장은 1~2년 뒷면 일반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말하자면 책을 망칠 게 뻔한 부분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평론가는 그 부분에 대해 내게 훈계를 했다. "그런 걸 뭐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앤드류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레이철은 맨발로 그 다리의 널판들을 가로지르는 경주를 좋아했다. 널판은 60센티미터 정도 간격으로 고르게 놓여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는 쉬웠다. 발을 디디는 곳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밤에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그러면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발을 디뎌야 했다. 한마디로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과 타이밍. 미끄러졌다 하면,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 하면 발이 널판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강이뼈가 뚝 하고 부러질지도 몰랐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만약 재수가 없어서 발이 쑥 빠져버리는 날에는 10미터 아래 강물 속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리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는 물론 한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거나 비틀거려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렇지만 말했듯이, 정작 중요한 점은 믿음, 나무 널판이 내가 발을 디디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널판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Rachel liked to have barefooted races across the planks of the bridge. The planks were evenly spaced, about two feet apart from each other. With a full moon it was easy, you could see where you were stepping, but other nights it would be pitch black and you would have to do it blind. It came down to faith. That and timing. If you slipped once, if your timing was just slightly off, your foot would slide into an empty space and you might snap a shin bone, or even worse, if you were unfortunate and slipped through, you might fall thirty feet into the water. And of course we were young and confident and so we never once slipped, or fell, or even stumbled. The trick was always to get a rhythm in your head and to concentrate on it. But like I said, it mainly came down to faith, an almost blind trust that the wooden plank would be right there when you put your foot down. And it always was.

130722 한윤형, 박해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facebook.asp?article_num=50130712171049


"부모님 세대는 사회 내에서 자신의 계층이 상승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자체가 상승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사회는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단 사실에 의문을 품은 바도 없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삶이 나보다 더 나을 거란 것도 그들에겐 명약관화한 진실이었다. (…) 하지만 이 세대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느낌'은 그와는 정반대다. (…) 친구 하나는 그랬다. "내가 불행한 것도 문제지만, 아이를 이런 세상에 낳기는 싫다"고. 옳든 그르든 지금 세대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다." (133~134쪽)


한윤형 : 90년대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아파트와 대학생이 급격히 늘어나다가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는 거죠. (중략) 어쨌든 임금이 그래도 상승하고 집값도 안정적이었던 90년대가 진행되다가 IMF 사태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우리가 IMF 사태를 겪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 충격을 흡수했더라면 한국 사회의 여러 변동들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박해천 : 그건 불가능하죠. 돌이켜 놓고 보니 90년대는 아주 예외적인 시기였지 그 자체가 정상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심하게 말하면 한국 사회가 제게 안겨준 제일 큰 행운은 90년대에 20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할 정도로요. 또 다른 행운도 세대적인 건데, 과외 금지 시기에 10대를 보냈다는 거죠. 학교 마치면 놀 수 있었고 놀다보면 심심해서 소위 '뻘 생각'이라는 것도 할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자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껏 누릴 수 있었고, 부모님은 사교육에 거의 지출을 하지 않으실 수 있었지요.


72년생인 소설가 정이현 씨는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던 세대였다고 쓴 적이 있어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느낌으로 살았던 거죠. (웃음) 4년제 대학을 다닌다면 취업 걱정을 안 해도 되었고, 덕분에 세상이 만만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한국이 정말로 유럽 선진국 어딘가에 가 있다는 건데요….


한국 사회에서 '문제'라 하는 것들은 이 방주를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어요. 동시에 예전에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청년 세대들에게도 방주 탑승권이 주어졌지만, 2002년 이후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올라타지 못합니다. 대출을 받지 않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부모님으로부터 증여받는 것뿐이지요.


"오늘날의 20대 혹은 청년 세대 담론이 흥미로운 것은, 청년들을 규정해보려는 윗세대들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20대들의 철저한 무관심 혹은 소외 현상에 있다. 20대는 본인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다. 한편 윗세대들 역시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데 20대의 견해를 참고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견해를 참고해야 하는지를 정하지 못한다." (169쪽)


이렇게 놓고 보면, 청춘이란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낭만주의적 색채, 자유연애에 대한 판타지,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이란 해방감, 자아의 발견 같은 그 속성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이런 속성들은 지금은 청춘이 아니라 '중2병'이라 불리죠. '얘가 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구나'가 아니라 '얘 중2병 걸렸구나'가 되는 거죠. (웃음)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청춘'이란 호명 자체의 설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전 같으면 직장인이 되어서야 경험하기 시작했던 삶의 하중이 계속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면서 이제는 중학교나 초등학교 고학년을 다니면서부터 그 하중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청춘이라는 표현은 시대착오적인 언어유희, 실재하지는 않으나 마음속에만 남은 로망, '언젠가 가닿을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 속의 신기루가 되어버린 겁니다. 실제로 청춘을 누리지 못함으로써 이미 청춘을 누린 이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져 가고요.


한윤형 : 정치적인 결집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청년 세대의 정치적 의식은 과거와는 다르게 발생하는 측면이 있어요. 가령 '20대 개새끼론'처럼 대학생들에게 정치의식이 없다고 핀잔했던 경우를 보면, 80~90년대 학번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대학 시절이 가장 진보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 대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화된 대학에서 정치의식을 가질 만한 탈출 공간이 없다보니 대학생일 때 오히려 더 자본 논리에 입각해서 살다가, 대학을 벗어나 취업 준비나 입사를 하면서 자신이 '을'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박해천 : 여러 지표를 봤을 때,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독립해서 원룸이나 자취방에 살고 있는 분들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그 '방'에서 탈출해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사실상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지금 서울이나 수도권 주요 도시의 아파트 가격이라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상은 그렇습니다. 물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2005년 전후, 그 이후에 떠나신 분들 상당수는 지금 하우스 푸어일 겁니다.


더 큰 문제도 있어요. 여러분들 부모님의 상당수가 50대 이상인데, 50대 자가 소유 비율이 60퍼센트 약간 넘습니다. 이 베이비붐 세대가 노후 생활을 영위해가는 데 필요한 최소 자산의 규모는 가구당 3억 6000만 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그 세대 전체의 24퍼센트밖에 안 돼요. 그리고 지금 가계부채가 1000조 원이라고 이야기되는데, 그 가운데 50대 이상이 진 빚이 그 절반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50대 이상 분들의 대부분이 제도가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사이에 경제 활동이 끝납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 부모님 세대의 상황입니다.


월세방에 거주하는 여러분들 중 일부는 여전히 '조금 더 기다리면 부동산 폭락이 올 거고, 그때 집을 구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폭락한 집의 집주인이 확률적으로 바로 여러분의 부모님, 친구의 부모님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베이비붐 세대의 자가 소유 비율(60퍼센트)과 가계부채 규모(400조 이상)가 이렇게 맞물려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경제 위기가 닥치면 가계대출이 몰려 있는 자가 소유자들에게 첫 번째로 피해가 가고, 그러면 갖고 있던 집들이 헐값으로 나오는 겁니다.


지난해 대선과 맞물려 반값 등록금이 이슈가 되었을 때 제 친구가 '이제 386 세대 자녀들이 대학 갈 때 되니까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구나'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의 부모인 50년대생들은 자녀의 대학 등록금이 마구 오를 때 별 불만 없이 그걸 지불했어요. 99년부터 2007년쯤까지 아파트 값이 올랐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고 경제 성장률도 2~3퍼센트 대에 정체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체제, 이전의 기회, 이전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고요. 그리고 이 모든 모순들이 가장 강렬하게 맞물려 있는 시점이 바로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여러분들이 3,40대의 나이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지요.

김사과, 금정연, 신형철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프레시안 books]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김사과 소설가 


"다시 윤리로 돌아와서, 그런데 왜 우리는 문학에 대해서 말할 때 윤리를 말하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요즘 문학가들이 문학에 대해서 말할 때 윤리를 말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할 때이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문학의 영향력은 보잘것없이 축소되었다. 문학은 학교의 권위로 연명하며 소수의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살롱 문학과 평범한 사람들의 여가 시간을 채워주는 대중(상업) 문학으로 양분되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문학으로 지칭하는 것은 전자이고, 그런 전자의 문학이 대중(상업) 문학과 자신의 차이점을 내세울 때 호명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윤리다. 그것이 다른 하찮은 글과 문학을 차별화 시켜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문학에 있어 윤리가 일종의 알리바이로 쓰인다는 의혹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문학적 인간들이 제발트의 글에서 이 시대에 흔치 않은 문학의 흔적을 보면서 열광하는 것은, 거기에서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흔치않게 세련된 알리바이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지식인/예술가를 주제/관객으로 다루는 홍상수의 영화가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짐승은 되지 말자'며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사태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 시대의 윤리란 사회적 급진성을 잃어버린, 더 정확히 말해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어떤 분야/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는 알리바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장되는 문학적인 윤리란 무엇인가? 제발트의 글을 통해 유추하자면 그것은 잊힌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파국의 풍경에서 통증을 느끼고, 결국 여행의 끝에 진짜로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윤리는, 엄청난 예민함에서 비롯된, 마비시키는 윤리다. 중단시키는 윤리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트의 글은 소설과 에세이, 허구와 비허구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글 더미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의 윤리가 무언가가 되기를, 어딘가로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광기가 우리 모두를 이런 폐허의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그것을 막으려는 의지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것이 전후의 지적/예술적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 회의주의다.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인 회의가 해체와 거부를 거쳐 마비로, 그러니까 완벽한 교착 상태로, 귀결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아무데도 갈 수 없다.


그런데 이 비탄에 빠져, 아무데도 갈수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마음을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그건 이 회의주의를 가져온 원인 세계를 망각한 채로, 회의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일종의 종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혹은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며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윤리의 결과물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 윤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학뿐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데도 이르지 못하지만 오직 문학이 되게 하는 윤리. 그것은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신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문학에 대한 열광으로 전도시키는, 지극히 낭만적인, 마음의 구조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1111134117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 '소녀의 외침' 이후!

[親Book] 김사과의 <테러의 시>

금정연 활자유랑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302125916


"물론 그들은 '어른'이고,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관의 대립을,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비평 게임을 통해 문학적인 것의 자장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녀의 소설들은 안전하게 소비된다. 그 모든 외침과 분노와 항의는 젊은 작가의 개성적인 목소리로 환원되고, 그것은 우리 문학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다양성의 훌륭한 사례가 된다. 그 속에서 그녀는 '당돌한 아이'가, '무서운 신예'가, '문단의 테러리스트'가, '쾌활한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억울하고 또 분한 일일 것이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믿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면, 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것.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쳤을 때,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초월적인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한다. 이 판단은, 이성을 믿으라는 아버지의 말, 마음속의 일들은 이성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말 중 어느 것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2588/p/1

발레리 줄레조 Valérie Gelézeau, <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Valérie Gelézeau, <아파트 공화국>


p.15-16

1993년 처음 서울을 방문해 아파트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은 이후, 나는 어떻게 이런 대단지 아파트가 양산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박사 논문의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친지와 가족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에 새롭고 흥미진진한 연구 소재들이 많을 텐데 프랑스에서는 이미 진부해재ㅕ 버린 아파트단지와 도시문제를 왜 연구하려 할까 의아해 했다. 

프랑스인들은 1950~60년대에 건설된 도시 주변지역의 대단지 아파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그들에게 이 아파트단지들은 ‘씨테’(cité), 관리 부실, 볼품없는 건축미, 저급한 생활환경을 연상케 한다. ‘대단지 아파트=도시문제 발생 지역’이라는 단순 도식은, 체계적으로 실증된 바는 없지만 서구 도시의 상징체계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서울의 아파트단지를 연구하는 기간 내내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사회 하층의 주택문제도 아니고, ‘도시근린지역’(banlieues)문제나 도시폭력 문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소모해야 했다.


1990년대 중반 현장 답사를 위해 프랑스에서 다시 서울로 향할 때 품었던 희망과는 달리, 내 연구는 한국에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아파트단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고 도시문제는 주택 용지의 부족 혹은 인구 과밀로 인한 것이며 그로부터 교통, 환경, 특히 주택문제가 야기되므로 아파트단지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식이었다. 이렇듯 모든 이들이 그 답을 이미 알고 있기에 필자의 연구 주제는 일반인뿐 아니라 인터뷰 대상이 됐던 아파트 경비원들의 비아냥거림을 면할 수 없었다. 이구동성으로 들려오는 첫 번째 근거는, 사람은 많고 공간은 부족하니 고층으로 올릴 수밖에 없다는 이해방식이었다. 한옥은 고리타분하고 불편한데 비해, 아파트는 현대성과 편리성이라는 미덕으로 미화되는 것이 그 두번째 근거였다. 


p.17

2000년 현재 1960년 이전에 지어진 도시 주택은 5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어진 가옥은 극히 드물어, 간신히 3퍼센트 정도 된다. 이토록 빈약한 수치는 도시의 급격한 확장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왔다. 어쨌든 그 확장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1960년에 존재하던 서울의 문화재 중 2/3 이상이 1990년 현재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주택이 들어섰다(인구주택총조사 1960; 1990; 2002).


p.73

우성의 건물은 크림색 바탕에 승강기 통로를 연하늘색이나 연분홍색으로 입혔다. 사당동 신동아단지는 파격적인 추상적 문양과 다양한 색조를 과시하여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의 물방울, 눈송이 문양을 측벽에 그려넣었다. 삼성단지 역시 연분홍과 연하늘색을 사용했다. 이렇게 황토색, 살색, 초록색, 하늘색, 분홍색 등 파스텔 톤의 색조는 1990년대식 경향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다. 탁한 백색 바탕에 검은색 현대 로고를 그려 넣은 현대단지가 이러한 경향을 따르지 않았던 유일한 예외였다. 


p.77

분명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이미지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면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아파트단지에 대한 전반적인 관찰에 충실하다면, 어떤 의미에서건 프랑스 아파트단지는 도시의 소외를 상징하며, 서울의 아파트단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p.99

실제로 한국의 주택정책은 소형 아파트를 희생시켜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 하위 계층을 주변 지역으로 내몰고 도심을 상층 계층이 차지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가져왔을 뿐이다. 


p.182-3

박씨에게 아파트의 ‘깨끗함’은 ‘지저분하고 어수선하며’ ‘옛날 골목’과 ‘허름한’ 집들이 있는 신공덕동과 대조를 이룬다. 아파트와 그 동네가 ‘깨끗하다’는 말은 ‘더럽다’는 말과 상반되기 보다는 오래되어서 낡고 값어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와 상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깨끗하다’는 오히려 ‘최근의, 새롭다’를 의미한다. 동시에 이 말은 아직 사용하지 않은 사물에 관련되는 청결함과 깨끗함의 특성을 암시하는 ‘새롭다’보다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하다. ‘깨끗하다’는 더 일반적으로 정결하며 바르고, 플라톤적 의미로 확장하게 되면 ‘정당하다, 진실하다, 좋다’를 뜻한다. 결국 “아파트는 좋다. 아파트는 좋은 주택이고 21세기 초반에 어울리는 주택이다”라는 것이 ‘깨끗하다’라는 형용사가 암시하는 것이다. 

아파트에 대한 가치 부여는, 한국인들이 ‘새로운 것’에 부여하는 의미를 드러낸다. 박씨의 이야기에서 재개발된 아파트단지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간에 놓인 대조는 물질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재개발은 산업화 이전의 농촌사회와 낡은 생활양식으로부터 해방된 도시산업사회의 이상을 상징한다.



# 논문을 옮긴 책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통계수치가 다양했다. 하지만 2003년 출간된 책이란 걸 고려했을 때도 (내 생각에는) 눈에 띄는 통찰을 찾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필자가 연구를 진행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이후로 고급형 아파트, 주상복합 등 등장 등 아파트 시장의 계층화가 더 심각해졌다는 것 아닌가 싶다. 


# 외국인 연구자의 한계를 안고도 이만큼의 실제 인터뷰와 필드워크를 행한 것이 존경스럽지만 한국 사회의 맥락을 깊게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낯설게 봄으로써 얻은 긍정적인 의미의 생경함은 있지만.


# 여튼 일전에 들은 명성(?)에 비해 좀 불만족스러운 책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outdated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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