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문자'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5.03.12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 / 장정일
  2. 2015.01.09 얼어붙은 시 / 황학주
  3. 2015.01.02 동사무소에 가자 / 이장욱
  4. 2014.11.18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
  5. 2014.11.10 141110 김훈의 한담 1
  6. 2014.09.11 카메라 정리 1
  7. 2014.05.16 강로긔의 맛 공작소 1
  8. 2014.04.23 140423 마이클 폴란 [요리를 욕망하다]
  9. 2014.04.22 손열음
  10. 2014.01.28 140128 소리연대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 / 장정일

* 아래는 장정일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해 쓴 글. 장정일 멋있다!

  지난 1월 7일 파리에서 일어난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에 대해나는 도합 세 번의 글을 썼다이 사건에 관심은 있었지만글은 기회가 되면 천천히 쓰리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나로 하여금 첫 번째 글을 쓰게 만든 계기는 <한겨레신문 1월 31일자에  정희진씨가 쓴관용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나는 정희진씨의 연재를 기다리면서 읽는 애독자이지만쿠아시 형제의 범행을 얼마나 분노했기에 비난받을 것이 뻔한 행동을 했을까?”라고 감싸는 것에 우선 말문이 막혔으며이슬람을 약자로 전제한 채 권력을 향한 풍자는 미학이지만 약자를 조롱하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 강한 의구심을 느꼈다. <한겨레신문 2월 5일치에 실린 나의 글이슬람근본주의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에 대해는 쿠아시 형제의 범행을 감싸는 것은 타락한 관용에 근거한 것이며,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라는 두 가지 주장을 담았다전문을 소개한다
    
  2015년 1월 7파리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논의가 끝날 줄 모른다. <한겨레지상에서도 여러 칼럼니스트와 독자가 의견을 밝혔다그 가운데는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이라는 주장이 많다샤를리 에브도의 과격한 풍자를 꾸짖는 사람들은 상식처럼 보이는 표현의 자유가 알고 보면 서구 중심주의적인 폭력이며 서구 세속주의자에게만 유효한 무기라고 비난한다풍자를 당하는 이슬람은 서구 주류 사회 안의 절대 약자라는 것이다그러면서 진정한 관용은 약자를 보살피고 개별성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오만한 서구 대 핍박받는 이슬람이라는 구도로 이번 사건을 본다하지만 그런 설명은 쿠아시 형제를 지도한 이슬람근본주의에 눈감는 반쪽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영미 제국주의가 중동에 심어놓은 이스라엘이 이슬람근본주의를 불러왔다거나쿠아시 형제가 이슬람근본주의에 심취하여 예멘 알카에다와 접속하게 된 원인 또한 프랑스 다문화주의 정책의 실패에서 찾는 분석이 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도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1988영어로 집필되고 출판된악마의 시라는 소설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코란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이듬해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로부터 사형Fatwa을 선고 받았다현재 루슈디는 330만 달러의 현상금을 목에 걸고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만 이탈리아노르웨이터키의 번역자는 피습을 받고 중상을 당했으며일본인 번역자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는 자신이 근무하던 쓰쿠바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루슈디와악마의 시번역자들은 하나같이 이란 사람이 아닌데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무슨 권한으로 타국의 국민에게 사형 선고와 그것에 준하는 처벌을 선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각 나라의 주권과 국제법을 괘의치 않는 이슬람근본주의가 있는 한세계는 여전히 교황이 파문권을 행사하던 중세다.    

  
세계화와 세속화에 직면해 앞으로 점점 증가하는 풍자와 조롱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의 운명이다이슬람권 안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나라에 속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이 운전을 할 수 없고이집트 여성은 청바지를 입을 수 없다이슬람 율법이 강한 국가에서 여성이 남자 의사의 진료를 꺼리다가 죽어가거나강간을 당한 누이를 남자 형제들이 명예살인하는 것도 다반사다그런 나라에서 이슬람을 비판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아예 자살 행위다이런 모든 것들이 이슬람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근거가 된다이슬람은 그때마다 테러로 응수할 텐가설령 누가 진지하고 예의를 갖춘 비판을 하더라도 오늘 같은 상황에서는 테러를 피하기 힘들다

  관용은 샤를르 에브도 사건’ 이후 가장 많이 들먹여진 용어다모두들 관용에 대해 한 마디씩 하지만관용의 가장 타락한 사용법은 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이며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즉 우리는 ,의 태도와 발상을 간직한 채 이슬람을 아이’ 취급하고그들에 대한 이의 제기를 폭력’ 행사나 되는 양 자기 검열을 해온 것이 아닌가과격하게 말해비판이 필요한 근본적 차이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고미소 띤 얼굴로 표현의 올바름에만 신경을 써 온 허다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타락한 관용이 풍자만화가들을 참극으로 내몬 게 아닌가?

  결코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이슬람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숫자를 제외하면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다이슬람은 고령화 되어가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가장 많은 20대 신도를 가졌다서구로 유입되는 이민의 대다수도 무슬림이다이슬람은 서구를 향해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예외로 다루어 달라고 더는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그들이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위의 글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가리켜 이슬람권 안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나라에 속한다고 쓴 것은 나의 실수다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에게 많은 전사를 공급한 수니파 와하비주의자들의 본거지가 사우디아라비아며 종교경찰의 위세도 대단하다나는 장기간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는 친미파 정권 사우디아라비아를 자유로운 나라로 착각했다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저 대목을 빼고 읽어 주시기 바란다.
  <한겨레에 쓴이슬람근본주의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에 대해가 너무 짧아서 새로운 글을 준비하고 있는 중에이택광이 두 차례에 걸쳐 아래와 같은 트윗을 올렸다
    
  내가 보기에 서구로 유입되는 이민의 대다수도 무슬림이다는 근거로 이슬람이 약자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장정일의 생각은 나이브하다그 이유를 박노자의 글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슬람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숫자를 제외하면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라서 약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억지스럽다그렇다면 부자 1%에 대해 그렇지 않은 99%도 강자일 것이다.

  내가 준비 중이었던 두 번째 글은 2월 16일 발행된시사IN설날 특집호에이슬람이 약자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전문을 소개한다.
    
  2015년 1월 7예멘 알카에다와 연계된 쿠아시 형제가 풍자 주간지샤를르 에브도를 습격했다내가 읽은 대부분의 칼럼은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이라고 말한다프랑스 안의 무슬림이 약자인 것은 맞지만그 사건은 한 나라에서 계획된 일국一國의 범죄가 아니었다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은 강하다고 말하는 반면미국의 주류 사상가들은 미국은 약해지고 있다고 말한다이슬람이 약자인가아닌가도 상대적이다.

  상식이 없는 사람만 모를 뿐하나의 문명권이나 지역의 흥망성세를 다룰 때 인구는 반드시 고려되는 상수다현재는 이슬람권의 인구가 그들을 강자로 환산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지 않지만인구는 언젠가 그들을 강자로 만들어 줄 잠재력이다서구로 유입되는 무슬림의 증가가 이슬람포비아(Islamophobia이슬람공포증)를 부르고 그것이 유럽의 극우주의로 되먹임 되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한 사회나 문명이 가진 힘의 총량을 하드 파워hard power로만 계산하는 습관에 익숙하지만어떤 사회나 문명에서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더 위력을 발휘한다이슬람은 서구만 한 군사적 하드 파워는 없지만강력한 소프트 파워(종교)가 있다우리가 무신론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누구도 한 사회에서 종교가 갖는 규정력을 부인하지는 못한다유물론자를 자처하면서 종교를 허구나 마취제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을 가리켜 슬라보예 지젝은 관념론자라고 말한다마지막으로, 21세기의 전쟁이 비대칭 전쟁Asymmetric warfare인 것도 중요하다. 911 직후에 일으킨 두 개의 전쟁에서 미국은 정복과는 거리가 먼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뿐탈레반도 알 카에다도 뿌리 뽑지 못했다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 직후, ‘관용이 만병통치약으로 떠올랐다하지만 정작 이런 시대일수록 관용을 의심하면서관용의 타락된 사용법을 물리쳐야 한다나는 2011년 10시사IN216호에서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첫째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둘째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 근거한 조바심이런 태도와 발상에서 출발한 타락한 관용은 비판이 꼭 필요한 근본적 차이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고스스로를 자기 검열하면서 표현의 올바름에만 신경을 쓴다미소 띤 얼굴로 서로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게 관용이라면그 아무도 자신의 신념이나 현상을 바꿀 필요가 없어진다

  관용의 엄격한 사용이 상대를 어른’ 취급하는 것이라면관용의 타락된 사용법은 상대를 아이’ 취급하는 것이다상대를 아이 취급하지 않고 어른 취급하는 일이나 스스로를 아이가 아닌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찾을 수 있는 윤리적 이점은서로에 대한 존중과 자기 책임의식의 배양이다내가 당신을 어른 취급 할 때비로소 나는 당신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또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해야자신에 대한 책임의식이 생긴다이슬람을 아이로 취급하는 서구의 인식론적 폭력이나 이슬람 스스로가 자신을 약자로 자처하는 기만행위 속에서는 그 어떤 존중이나 책임의식도 싹트지 않는다이슬람을 약자로 간주하려는 사람은 이슬람에 대한 존중을 내버린 사람이며이슬람을 향해 자기 책임의식 따위는 내팽개치라고 선동하는 것이다그것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우리 모두가 타락하는 길이다.

  세계화와 세속화에 직면해 앞으로 점점 증가하는 풍자와 조롱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의 운명이다이슬람 율법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여성의 운전과 청바지가 금지되어있다거나여성이 남자 의사의 진료를 꺼리다가 죽어가는 일강간을 당한 누이를 남자 형제들이 명예살인하는 따위의 야만은 충분히 이슬람을 풍자하고 조롱할 근거가 된다이슬람은 그때마다 테러로 응수할 텐가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이제껏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진보라 일컫는 논객들은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의 총체적 접근에 관심이 없다그저 한국 내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에 외삽 시키고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을 한국 상황에 필요한 교훈이나 경고로 전유할 생각뿐이다그런 목적에서 쿠아시 형제의 테러는 프랑스 내국인 사이에 불거진 계급문제로 축소되고그들의 배후인 이슬람 근본주의는 사건 관계도에서 지워졌다이들의 말이 맞는다면쿠아시 형제를 지도한 예멘 알카에다는 무려 전 세계의 계급투쟁을 위해 창설된 국제 노동자 연맹이고,샤를리 에브도를 급습한 것도 심지어 계급해방을 위한 거사다그렇다면 향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승리 속에 무슬림이 아닌 서구 백인이나 아시아계 프롤레타리아트도 기입될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은가그게 아니라면쿠아시 형제의 범죄는 인종차별에 맞선 또 다른 인종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진보 논객들이 참극을 맞은샤를리 에브도를 한번도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로 옹호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위에서 지적한 외삽과 전유가 매끈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샤를리 에브도가 절대 언론사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진보 논객들에게샤를리 에브도는 새누리당이고 재벌이고 10%여야만 했고쿠아시 형제는 비정규직 노동자고 실업자며 90%를 뜻해야만 했다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프랑스 파리에서 생긴 사건은 이렇게 해서 월드 뉴스가 아닌 대한 늬우스가 되었다

  웬디 브라운의관용(갈무리,2010)은 관용이 더 이상 수동적인 가치가 아니라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이 시대의 필독서다서구가 주도하는 다문화시대의 관용이란,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타자를 배제하는 수단에 이용된다이때 포용과 배제를 정하는 관용의 기준은 서구의 지배적인 가치와 문화다또한 관용은 당면한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자기 내부에서 분출하는 정치사회적 적대를 차이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하다이 책을 읽고 나면지금까지 이 주제의 막강한 고전이었던 볼테르의관용론(한길사,2001)이나 필리프 사시에의왜 똘레랑스인가(상형문자,2000)는 낡은 정도가 아니라아예 해독害毒이 필요한 문서로 보인다우려되는 것은관용이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라는 이 책의 논지를 너무 잘 수용한 나머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앞서 나온 이택광의 트윗글을 기억하는 독자라면위의 글에 나온  상식이 없는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관용』의 역자가시사IN』에 나온 내 글이 관용』의 요점이 아니라면서 "헛다리"'를 짚고 있다길래, 메일을 해서 오해를 풀어 주었다. 저 글은 차례대로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어떻게 하면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을 뿌리칠 수 있을까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 좌파 논객들의 편향적 자세에 대한 나의 생각을 피력한 글이며, 그것들은 마지막 문단에서 가서야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연재의 알리바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언급된관용과 아무런 연관성 없이 씌어 졌다. 웬디 브라운의 여러 논지 가운데 이번에 내가 선택한 것은  관용이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 라는 사항이었으며, 그 주장을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그런데 메일을 통해 역자의 오해를 풀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무신경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자분은 내가 메일로 그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했던 진짜 '목적'은  헤아리지 못하나보다. 내가 모종의 부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이건 내가 그에게 '빚질' 사항이 아니라, 역자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종'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 글 끝에 나온다).     
  두 번째 글을 쓰고 나서나는 이슬람국가IS에 대한 또 다른 글을 쓰기 위해 이런 저런 책을 모아 읽기 시작했다그러던 3월 2(월요일저녁 <한겨레신문으로부터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글항아리,2015)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아직 책이 서점에 배포되기 전이어서이튿날 오후 2시 30출판사가 퀵서비스로 보낸 책을 받았다워낙 손바닥만한 크기의 책인데다가역자의 말을 뺀 80여 쪽의 책은 읽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그렇게 빨리 읽었던 데에는 지젝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지 짐작이 되었던 데다가설날 이후로 이슬람에 관한 책을 꽤 읽었기 때문에 지젝이 이슬람 역사나 정치에 대해 하는 말은 오히려 이의 제기할 대목이 보일 만큼 쉬웠다이 글의 마감은 목요일 오후 2시까지였는데나는 수요일 아침 10시쯤에 원고를 보냈다(이렇게 빨리 쓰게 된 데에는 얇은 분량과 선행 학습도 큰 역할을 했지만, <한겨레>가 청탁한 원고 분량이 15매였다는 이유가 더 크다나는 2011년 신년호부터 지금까지 4년 넘게 격주로시사IN에 독후감을 연재하고 있는데그 분량이 15매다그래서 매번 아홉 문단으로 써온 그 리듬을 고치지 않고 탈 수 있었다). 전문을 소개한다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을 일으킨 쿠아시 형제와 그들의 순교를 지지하는 무슬림은 풍자 화가들의 예의 없고 저속하며 지나친 조롱이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한다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저런 주장은 이슬람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기각해야만 옳다이를 테면 우리는 누군가와 논전을 벌일 때 인신공격은 삼가 해 줘대신 진정한 비판이라면 받아들이겠어라고 당부하고는 하지만진실은 그 반대다인신공격이나 퍼부어 대는 작자는 마음속으로 경멸할 수 있으나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견디기 힘들다.

  무슬림은 이슬람에 대한 조롱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조롱이 아니라 예의와 진지함을 갖춘 학구적인 비판이었다고 해보자그런 글이 이슬람에게 수용될 수 있었겠으며그 글을 쓴 학자는 과연 테러를 피할 수 있었을까학자의 명망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는 더더욱 테러를 면하지 못할 뿐 아니라진지한 비판은 오히려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조롱과 달리 이슬람에게 그를 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당성과 필연성마저 부여해 준다쿠아시 형제에게 살해당한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향해 인과응보라는 막말을 쏟아내는 좌파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마도 그 학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슬람과 같은 입장이거나 더 가혹하게 학자를 비난하고 나설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글항아리,2015)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에 대한 지젝의 긴급 발언이다이 책에서 지젝은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하게 정죄해야 한다은밀하게 경고하듯이 정죄해서도 안 된다라며이번 사건에 대해 도착적인 논변을 편 좌파 지식인들과 본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그러면서 좌파 지식인들의 판에 박은 레퍼토리를 하나씩 공박한다.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은 말한다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형제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한 것이 너무 끔찍해서 놀랐다고 한다.(맞다하지만 그 형제들은 프랑스 풍자 잡지 대신 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할 수 있었다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슬람인은 사실상 서구에서 가장 착취당하고 대접받지 못한 소수라고 한다.(맞다그러나 아프리카계 흑인은 훨씬 더 심하다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하거나 폭탄을 던지지 않는다.)”

  방금 본 것처럼 지젝은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곧 쿠아시 형제에게 온정적인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공박을 모두 괄호 처리 했다괄호는 종종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해?’라는 가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형식이기도 하다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맥락 좋아하시는 독자가 계시다면괄호를 하나 더 보내 드린다. “(주문을 외우듯이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우리 서구인은 제3세계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살인자인데어떻게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정죄할 수 있는가?)”

  지젝은 긴급 발언을 통해 자유주의 좌파는 이번 테러 사건을 바로 해석하지도이슬람근본주의를 해결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못박는다좌파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중동에서 저지른 모든 잘못을 나의 십자가로 짊어지기로 한 사람들이며그들의 죄책감은 이슬람에 대한 밑 모를 관용으로 표출된다죄책감에 기초하고 있는 관용은 마치 초자아 앞에 우리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듯이 이슬람 앞에 항상 수세적인 양보를 거듭하게 된다결국 네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관용할수록 이슬람교도는 너를 더 강하게 압박할 것이다.”

  죄책감에서 생겨난 관용은 현실도 정의도 왜곡시킨다가해자였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절멸수용소에 보내는 것을 막지 못하고 방관했다는 죄책감으로 지금껏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에 눈과 귀를 막고 있다이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죄책감이 잘못된 속죄의식이라면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좌파의 어물쩍한 태도 역시 잘못된 속죄의식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전반부는 이슬람근본주의 테러집단은 악마가 아니라 서구 근대화가 부러운 열등생이라고 말한다이들은 칼리프 시대를 회복해야 한다면서 실제로는 근대화를 추종한다는 점에서 나치가 등극하기 직전에 창궐한 보수 혁명 운동과 닮았다후반부는 이슬람근본주의의 발생 원인을 서구 제국주의나 세계화 또는 서구의 반이슬람주의 같은 외부 요인에서 찾는 이들과 달리이슬람의 기원에서 찾고자 한다스탈린주의를 공산주의의 오점으로 보지 않고 스탈린주의로부터 평등을 급진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지젝은 여기서도 똑같은 마술을 반복한다즉 이슬람 최대의 약점이자 이슬람근본주의자들 손에 더욱 악화된 여성 학대가 실은 이슬람의 부정성을 덮으려는 안쓰러운 증상이며이슬람 현대화는 애초에 무함마드를 계도하기도 했던 이슬람 여성의 주체화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약간 김빠진 암시가 그렇다지젝의 말버릇을 흉내 내자면, ‘이것만으로는 테러를 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관용은 서로를 자기 책임의식을 지닌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911은 이슬람이 서구를 향해 우리를 성인 취급 해달라!’는 통첩이었으나 서구는 그것을 묵살했다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어떤 일화는 서구 제국주의 탓이 아니라이슬람 내부에 어른이 되기 어려운 장애가 있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강간 같은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확정하고 있는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강간을 당한 소녀는 체형에 처하고 기혼녀는 간음죄로 사형된다까닭은 남자가 여자를 강간할 때그는 이미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혹받았거나 자극되었기 때문이다자극을 주면 본능이 반응한다는 이 구조와 풍자에 자극 받아 총질을 해대는 무슬림 청년의 테러 행위는 얼마나 흡사한가강간은 남자의 죄가 아니라 자극받은 본능의 어쩔 수 없는 자동 반응이라고 배우며 자라난 무슬림 남성의 자기 합리화 속에 자기 책임의식이 배양될 리 만무하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에 따르면본능 이전에 자기 점검이 가능한 만큼 책임의 주체도 그만큼 뚜렷한데 말이다.
    
 
  잠시 나왔지만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전반부는 이 책의 원제인 이슬람과 모더니티에 대한 지젝의 해석이고후반부는 이슬람에 대한 지젝의 내재적인 비판이 시도되고 있다하지만 보시다시피 이번 서평에서는 지젝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자유주의 좌파들의 이슬람에 대한 온정주의적 태도(관용)’에 초점을 맞추었다이 책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맥락과 비판은 애초에 내가 준비하고 있던 이슬람국가에 대한 원고에 들어갈 것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서평을 보고대한민국에서 지젝에 대한 유권해석을 위임받은 듯 자임하는 이택광이 아무 말이 없을 리 없다그리고 그 언급은 100% 내가 예상한 대로 나왔다
    
  장정일 선생이 지젝 신간에 대해 한겨레에 서평을 쓴 것 같은데책 내용을 반대로 소개하고 있어서 좀 재미있다지젝이 본문에서 비판하는 '자유주의 좌파'가 바로 장정일 선생 같은 관점을 취하는 이들이다.
    
  이택광은 내가 자유주의 좌파의 관점을 가졌으며 지젝이 본문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택광은 아직 내가 무슨 관점에 서 있는지 모르나보다(세 편의 글을 보면, 너무나 명확한데!).  이택광의 트윗을 보면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읽긴 한 모양인데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 이택광은 지젝이 무슨 이유로 자유주의 좌파를 비난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나보다.
  트윗을 하는 사람들은 트윗은 단지 사신私信일 뿐이라고도 하고, ‘트윗은 소통이라고도 말한다이렇게 말하는 작자들은 반드시 오함마로 아가리를 깨부수어야 한다.’ 먼저 트윗은 그 기술 속에 리트윗 기능이 탑재 되어 있는 만큼절대 사신일 수 없다트윗을 하는 사람이 은연중에 무한 트윗을 의식하고 있는 바에야 그것이 사신일 리 있는가.
  또 트윗은 일방적인데다가 타인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데나 주로 사용되지결코 소통이 아니다비방과 조롱도 소통이 되고자 한다면자신이 잘못했거나 실수했을 때 트윗을 통해 정정을 해야하는데 절대 그런 일은 없다자신의 잘못이나 실수가 밝혀지면 그저 잠수를 할 뿐이다그러는 사이에 장정일 선생이 지젝 신간에 대해 한겨레에 서평을 쓴 것 같은데책 내용을 반대로 소개하고 있어서 좀 재미있다.”(이게 내가 예상한 것)는 원래의 비방과 조롱은 계속 인터넷에 나돌아 다닌다.
  이택광은 내가 어떤 대목에서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반대로 소개하고 있는지트윗처럼 일방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제대로  지적해야 할 것이다.
-----------------------------------------------------------------------------------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가 쓸 수 있는 SNS 수단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런 수단을 거부하는지라 고클을 이용합니다. 아무쪼록 널리 퍼뜨려 주십시오.

  *이택광씨가 지면을 얻어 반론을 한다는 소식이 있어, 제목과 본문 일부를 수정합니다.

얼어붙은 시 / 황학주

얼어붙은 시

/ 황학주

한 사람의 젖어가는 눈동자를
한 사람이 어떻게 떠올리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를 잊지 말자
파탄이 몸을 준다면 받을 수 있겠니

숨 가쁘게 사랑한 적은 있으나
사랑의 시는 써본 적 없고
사랑에 쫓겨 진눈깨비를 열고
얼음 결정 속으로 뛰어내린 적 없으니
날마다 알뿌리처럼 둥글게 부푸는 사랑을 위해
지옥에 끌려간 적은 더욱 없지

예쁘기만 한 청첩이여
목이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좀 아프면 어때
아픔은 피투성이 우리가 두려울 텐데

순간마다 색스러워질 수 있는 것
그 모든 색 너머 투명한 얼음이 색색으로 빛나는,
색이 묻어나지 않는 색의
기쁨인 그것들

우리는 대못 자국 같은 눈빛이
맑디맑게 갠 다음 무엇을 보는지
여간해선 짐작 못한다


동사무소에 가자 /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도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명료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


p.10
왜 선택 앞에서 사람들은 그토록 무력해지는 것일까? 문제는 단순히 선진국 소비자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물품이 지나치게 많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오늘날 만연한 선택 이데올로기가 점점 소비자들의 불안감과 부족감(feeling of adequacy)를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p. 12
고도로 개인화된 우리 사회는 수백년 전부터 자본주의 발전의 초석으로 존재해왔던 '자수성가형 남성/인간self-made man'(뿐만 아니라 자수성가형 여성self-made woman)이라는 관념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

p. 13
선택 이데올로기의 역설은,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잘못이라고 믿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불안할 때 우리는 해야 할 것을 일러주는 권위자에게 너무 빨리 선택권을 넘겨버리고 그와 동일시한다. ... 하지만 우리는 선택 이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고, 선택과 더불어 오는 상실들을 피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피하고 싶다 하더라도 끝없이 연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명언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인생을 선택할까 궁리하느라 실제 살아가는 일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When making a choice in life, do not forget to live.").

p.19
후기 산업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추구하는 향락에는 제한이 없는 것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 후기 산업자본주의가 선택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영속화한다. (p. 26) 

p. 42
오늘날에는 '자수성가'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심지어 어느정도 성공해 부를 획득하는 것조차 흔하고 당연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과제는 자기창조다. 포스트모던한 전문직들에게는 삶 그 자체가 일종의 예술 창작 활동 혹은 도전적인 기업 경영, 즉 계속해서 개량하고, 개정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며, 성공은 그것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p. 68
철학자들은 불안과 선택의 연관성을 오랫동안 주목해왔다.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은 자유로부터—즉, 가능성의 가능성을 직면해야 할 때— 나온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심연 앞에 선 개인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이 심연으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심연에 투신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p. 83~85
제이크 핼펀Jake Helpern은 Fame Jukies: The Hidden Truth behind America’s Favourite Addiction에서 유명인들의 개인 비서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발달시키게 되는지를 살펴본다. … 초반에 이들은 자신의 유명한 고용주와 동거동락하다시피 하며 점차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 유명인의 비서에게 요구되는 것은 광신적 종교 집단의 일원에게 요구되는 것과 유사하다. 핼펀은 이렇게 지적한다. ‘유명인의 비서와 광신적 종교 집단의 일원은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되며—위대한 이들을 보좌하면서 권력에 너무 가까워진 그들은 권력을 거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 이는 중독적이다.’ … 대중잡지 <US 위클리>는 유명인을 친근하고 이웃 같은 현실의 사람으로 나타내고자 애쓴다. … 이 잡지는 스타 이름의 약칭(젠Jennifer Aniston)을 사용해 그녀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유명인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 이런 이유로 유명인 되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선택지가 된다. 
유명인과 동일시하려는 욕망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로버트 팔러Robert Pfaller가 명명한 ‘상호 수동성’interpassivity 개념을 도입해 보면 좀 더 복합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상호 수동성은 개인과 그 개인을 대신해 무언가를 경험해주는 대리인proxy 사이에서 일어난다. 가령 세르비아에서는 상을 치르는 사람들이 대신 애도해줄 여성들을 고용해 장례식장에서 곡을 하게 한다. 불교도에게는 자신을 대신해 기도해주는 마니차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결코 보지 않을 영화를 녹화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녹화기가 그들을 대신해 영화를 봐주기 때문이다. 

p. 87~88
… 우리는 건강조차도 매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선진국에서 의료 서비스가 운용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왔다. 현재 의료 서비스에서는 선택과 자비 지배라는 관념을 예찬한다. 의사는 더는 권위자를 자처하며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법을 권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저 환자에게 선택지들을 고지하고 환자가 결정하도록 하거나 동의(또는 거부)를 표하게 하는 경우가 흔하다. … 
현재 우리는 DIY 윤리를 몸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기 몸에 대한 책임과 통제를 스스로 떠맡으려 할수록 질병이나 허약함, 병원 치료와 같은 문제들은 점점 더 괴로운 일이 된다. 건강 문제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잘못이 되고 있다. … 우리는 심지어 ‘스트레스를 관리’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병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다른 부분—자기치유self-healing—에 실패했다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기 치유 이데올로기가 많은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공공 의료 서비스를 민영화하기 시작한 시기에 급격히 번성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 105
뒤푸르는 계몽주의 시대 초반에 개인이 자신의 준거를 바로 자신에게서 찾게 되었다고 본다. 바로 이때부터 주체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데 더는 외부의 존재—신, 나라, 혈통—를 참조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 고유의 기원이 되었다. … 뒤푸르는 탈근대 사회에는 더는 상징적 대타자, 즉 주체가 요구를 표명하고 문제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권위’가 되는 불완전한 실체는 없다고 결론 짓는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장이 대타자가 된다. … 



141110 김훈의 한담

김훈의 한담(閑談)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366&aid=0000226568&sid1=001


나는, 가령 나의 무질서와 계통 없음을 말하는데, 누군가 인간의 신념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신념을 가진 자의 편이 아니고 의심을 가진 자의 편인 것 같다. 신념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내가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의심을 가진 자들 쪽에 더 많은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허무주의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이념이나 정치 노선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아마 그것이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을 보면 주전파와 주화파의 싸움이 나오는데 나는 아무 편도 아닌 것이다. 그 어느 쪽도 건전한 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에게 삶 이상으로 중요한 게 없다고 본다. 살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허무주의가 나의 글에 물론 있고, 세상의 허무와 싸우는 인간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허무주의냐 낙관주의냐 재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아니다. 일반 사람보다는 많이 읽는 사람이다. 온갖 책을 다 읽는다. 문학, 철학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자연과학서도 본다.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도 읽는다. 소방관 자격시험 문제도 읽는다. 여성 화장은 어떻게 하나, 그런 책도 읽는다. 다만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추호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의 바탕 위에다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거꾸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나 신념의 바탕 위에 사실을 세우려고 하면 다 무너져 버린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고 구체성이다.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체제나 지향성 그런 것은 나에게는 덜 중요하다. 어떤 가치 체계라도 삶의 구체성 위에 건설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자신 주변의 삶을 똑바로 관찰하지 않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카메라 정리




- 문사 14년 여름호. 하시라에 오타가 났다!






라스 폰 트리에는 정말 세상의 ‘샐리그먼들’을 확 쏴버리고 싶은 것이 아닐까? 아니, 적어도 쏴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이 <님포매니악>을 완성한 가장 큰 동력이 아니었을까? 이런 상상을 부추긴 꼬투리는, 조가 불감증을 극복하기 위해 말이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출신 남성을 일부러 섭외해 섹스하는 대목이었다. 회고 도중 ‘니그로’라는 비하 용어를 조가 입에 올리자 샐리그먼은 정색하고 그럼 못 쓴다고 제지하는데 조는 마치 이 비판을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된 반론을 펼친다. 그녀는, 하나의 단어가 사용 금지될 때마다 세계는 생기를 잃어간다는 신념을 피력하는 한편 나쁜 내용의 이야기를 좋은 포장으로 하면 떠받들고 악의 없는 이야기를 나쁘게 하면 핍박하는 세태를 꼬집는다. 


http://www.cine21.com/news/view/group/M406/mag_id/77605



Max Ernst, 33 Little Girls Chasing Butterflies


강로긔의 맛 공작소

로긔로긔 강로긔가 음식 칼럼을 채널 예스에 연재하고 있다. 


아이 재밌어 +_+


http://ch.yes24.com/Article/List/2496


쏠쏠한 정보들이 그득하다. 

140423 마이클 폴란 [요리를 욕망하다]

마포구청역에 내려서 날씨도 좋고 슬 걸어오면서 망원시장을 통과했다. 봄 저녁 시장의 시끌시끌함이 좋았다. 정육점 아저씨가 친절했다. 간 소고기를 300g 사서 볼로네제 소스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수입육이라 그런지 잡내가 너무 난다... 냄새를 잡으려고 내가 타임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타임을 넣었다. 잔뜩 끓이면 냄새 안 나겠지? 흑...


오이가 다섯개에 천원 막 이랬는데 살걸 후회된다. 못 먹으면 얼굴에라도 붙이게 ㅋㅋㅋ


*


간간이 읽고 있는 <요리를 욕망하다>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로 잘 알려진 미국인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의 책이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발췌한 부분처럼 흥미로운 지점이 있지만 '요리의 사회문화사'라는 거창한 부제에 비해서는 별로 건질 거리가 없다. 통돼지 바베큐에 대한 텍사스적 로망이라든가 하는 미국인 아저씨의 정체성이 강하게 느껴져서 공감할 수 있는 지점도 별로 없다. 불-물-공기-흙이라는 구성도 의아하고... 차라리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살걸... 비 윌슨의 <공포의 식탁>도 앞에만 조금 봤는데 손이 잘 안 간다. 


출퇴근길에 곰선배가 빌려준 <돈가스의 탄생>을 (이제야) 읽고 있는데 이건 훨씬 재밌다! 일본에서 육식이 1200년 동안 금지됐었다니! 이렇게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마이클 폴란 <요리를 욕망하다>(에코리브르 2014)


고대에 널리 퍼진 동물 공희 의식은 이러한 양심의 가책이 인간을 매우 오랫동안 괴롭혀왔음을 암시한다. 칼로 목을 따기 전에, 그리스의 사제들은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이마에 물을 뿌려서 동물이 머리를 흔들면 이를 찬성한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아주 냉정히 생각하면, 희생제의의 많은 요소는 실로 우리가 꺼림칙하게 여기지만 해야 하거나 어쨌든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간편한 합리화처럼 보인다. 이런 의례를 통해 먹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신이 요구하기 때문에 요리를 하는 거라고 우리 자신을 달래는 것이다. 우리가 불 위에 동물의 고기를 굽는 이유는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기를 피워 공물이 하늘에 닿게 하기 위해서라고, 가장 좋은 부위를 먹는 까닭은 육즙이 제일 풍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은 연기만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되뇌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음식이 '먹기 좋아야'-맛있고, 안전하며, 영양가가 풍부해야-할 뿐만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빌리자면, '생각하기에도 좋아야' 한다고 고집한다. 우리는 여러가지를 먹지만, 특히 생각을 먹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p.66-7)


*


썷어놓은 채소는 적절히 배합해야 냄비 요리 특유의 맛과 문화적 정체성이 비로소 우러난다. 그래서 깍둑썰기한 양파와 당근, 셀러리를 버터(때로는 올리브오일)로 소테하면, 프랑스 요리 중 하나인 미르푸아(mirepoix)가 완성된다. 그러나 잘게 썬 양파, 당근 및 셀러리 다진 것을 올리브오일로 소테하면 이탈리아 요리의 기본인 소프리토(soffrito)가 완성된다. 그런데 '소프리토(sofrito)-f 하나와 t 하나로 쓸 때-는 양파와 마늘, 그리고 셀러리 대신 썬 토마토를 소테한 에스파냐 요리다. 레시피에 썰어놓은 파와 마늘, 생강이 기본으로 들어가면, 서구 음식과 아주 다른 이른바 '아시안 미르푸아'라고도 하는 음식이 된다. 이는 극동지역 여러 요리의 기본이 된다. 인도에서 냄비요리는 보통 '타르카(tarka)'로 시작하는데, 깍둑썰기한 양파와 향신료를 정제 버터 또는(ghee)로 볶은 것이다. 이런 용어나 기법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이처럼 썬 채소를 베이스로 한 음식의 향을 통해 우리는 어느 나라 요리인지 즉시 알게 된다. (p. 155)


*


양파는 왜 그토록 냄비요리에 널리 쓰일까? 소금 다음인데, 양파만큼 광범위하게 쓰이는 요리 재료를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다. 전세계적으로 양파는 두번째로 중요한(토마토 다음으로) 채소 작물이며, 농작물이 자라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기를 수 있다. 그러면 양파는 음식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사민은 양파를 비롯해 흔히 쓰이는 향신 채소들이 널리 쓰이는 이유는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도 음식에 단맛을 더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집요하게 설명을 요구했더니, "화학반응인 거죠"라고 답했다. (...)

그런데 어떤 종류의 화학반응이란 말인가? 미르푸아를 폭넓게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맥기조차도 그답지 않게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양파와 당근에 들어 있는 당분이 소테 팬 안에서 캐러멜화됨으로써 각종 맛 화합물이 요리에 더해진다는 답변은 명백히 틀린 답변이다. 캐러멜화된 당분이라는 이론은 셀러리로 미르푸아와 소프리토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셀러리는 수분과 셀룰로오스를 제외하면 단맛을 거의 내지 못하는 채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향신 채소를 볶을 때 캐러멜화(또는 마이야르 반응)를 제외한 다른 과정이 끼어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마이야르 반응은 요리에 맛을 더해주는 과정이지만 비밀이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다. 

(...) 낮은 불에서 천천히 익히면 채소 안의 긴 단백질 고리가 아미노산 구성요소로 분해되며, 그중 (글루탐산처럼) 음식에 '우마미'-일본어의 '맛있다'라는 뜻인 우마이에서 온 말-라는 감칠맛을 더해준다고 알려져 있고 이런 사실이 적어도 그럴듯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온라인에 단서가 많기도 했다. 우마미는 이제 짜고 달고 쓰고 신 맛과 더불어 제5의 맛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다른 맛과 마찬가지로 혀에 우마미만을 탐지하는 수용기가 있다. 별 맛이 없는 셀러리도 냄비요리에 감칠맛을 더할 수 있으며, 이것은 탄수화물로 세포벽이 단단해진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


흔히 사용되는 여러 향신료와 마찬가지로, 양파는(그리고 마늘도) 요리한 후에도 남아 있는 강력한 항균화합물을 함유하고 있다. 미생물학자들은 양파, 마늘, 향신료가 고기에 있는 위험한 세균이 성장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한다고 생각한다. 고기가 훨씬 쉽게 부패되는 적도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이런 식물이 요리에 훨씬 자주 들어가는 이유를 알려주는 힌트인지도 모른다. 냉장시설이 등장하기 전에 음식, 특히 고기가 세균에 오염되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인도 요리를 보면, 고기 요리보다 채소 요리 레시피에 향신료가 적게 들어간다.) 순전히 시행착오를 거친 덕에, 우리 조상들은 인체에 해롭지 않게 보호해주는 특정 식물의 화학성분을 발견했다. 양파는 아주 강력한 항균성 식용식물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그런 식물의 '맛이 좋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분자들의 맛을 후천적을 학습한 효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p.175)



손열음

손열음은 글도 잘 쓴다. 


http://sunday.joins.com/article/search_list.asp?query=%BC%D5%BF%AD%C0%BD&news_sort=date&news_source=61&news_sch=reporter&sdate=&edate=


킁. 

140128 소리연대









"체호프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꾸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넘어지는 건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불행하고 다른 이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형제나 가까운 지인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머나먼 타국 흑인들, 중국의 막노동자, 먼 우랄에 사는 노동자의 아픔을 이웃이나 아내가 겪는 불행보다 더 쓰라린 도덕적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이들은 꿈꿀 수 있었지만 지배는 못했다. 이들은 기회를 놓쳤고, 만들지도 못할 나라를 설계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열정과 불같은 자기희생, 순수한 영혼, 도덕적 고귀함으로 가득 찬 사람이 언젠가는 살았고 지금도 무자비하고 추악한 러시아의 어딘가에 살고 있을 거라는 사실 자체가 좀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약속이다. 훌륭한 자연의 법칙 중 가장 훌륭한 것이 약자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 나보코프



올리고 보니 오늘이 체호프의 생일이다. 




prev 1 2 3 4 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