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문자'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2.08.27 칼럼리스트 듀나의 '유시민 커피 논란을 예언한 영화' 중에서
  2. 2012.07.24 120724 멜랑콜리아
  3. 2012.05.02 120501 헌법의 풍경
  4. 2012.04.12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5. 2012.03.27 120326 한국문학과 그 적들
  6. 2012.01.26 120126 그대로 두기 / 다이애나 애실 中 1
  7. 2011.06.25 110625 배수아 당나귀들
  8. 2011.05.14 110514 Humpty Dumpty
  9. 2010.12.12 101212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10. 2010.12.06 부르디외

칼럼리스트 듀나의 '유시민 커피 논란을 예언한 영화' 중에서

‎"

(전략) 사람들은 이명박 정권의 유일한 장점이 한국 풍자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것을 믿었다. 정말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온갖 매체와 온갖 서브장르들이 튀어나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여기에 대해 점점 회의적이 된다. 아마 지난 몇 년은 풍자 예술이 부흥한 시기로 보다는 풍자 예술의 현실적 한계에 대해 알게 된 시기로 기억될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아주 간단하고 해 없는 예를 들어보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뒤로, 사람들은 그의 두 가지 버릇을 조롱했다. 급할 때마다 시장을 찾아다니며 뭔가를 꾸역꾸역 먹는 것과 입만 열면 ‘나는 전에 이걸 해 봤는데’라고 말을 하는 버릇. 모두 우스꽝스러웠으며, 인터넷에는 이를 놀려대는 게시물들이 꾸준히 올라왔다. 그런데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을 보라. 그는 여전히 시장에서 군것질을 하고, 입만 열면 ‘나는 전에 이걸 해 봤는데’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조롱에 상처를 입거나 자성을 할 만한 감수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지진을 풍자하는 것과 다를 게 뭔가. 결국 우리만 잠시 웃었을 뿐이다.] 지금은 이명박의 이런 버릇은 피곤하기만 할 뿐 더 이상 웃기지도 않다. 그렇다면 진 건 인터넷 풍자가들이다. 슬픈 것은 이게 짜증나지만 비교적 무해한 이 두 버릇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후략)

"


칼럼리스트 듀나의 '유시민 커피 논란을 예언한 영화' 중에서

http://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1636

120724 멜랑콜리아

"영화의 대단원에서 우리 대부분이 느낀 저 불길한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지 아름다운 영상의 속임수일까? 혹은 저것은 영화일 뿐이라는 안도감?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이 영화에서의 종말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 이 세계의 모든 불행과 비참이 철저히 차별적인 데 반해 이것은 모두에게 완전히 평등한 종말이고, 타협적으로 희망을 남기는 여느 종말 서사들과는 달리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지 않는 깨끗한 종말이다. 이렇게, 모두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필사적으로 이 세계의 종말을 막아야 할 간절한 이유가 과연 얼마나 있는 것일까? 영화관을 나와서 그제야 눈물을 흘린 몇몇 관객은 아마도 그 이유를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울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멜랑콜리아

120501 헌법의 풍경

(* 는 나, - 는 요약)



머리말


"우리는 그동안 승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까닭에 표면상 평온해 보이는 사회를 '법의 지배'로 오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탈을 쓴 폭력의 지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의 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규범이 사라진 세상에서 정의란 결국 올바른 절차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의나 진리를 찾아가는 이런 과정을 일부 전문가들이 독점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의를 찾아가는 그 과정에 당당한 주체로서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국가, 법, 법률가, 인권의 문제입니다. 헌법은 국가를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헌법과 법률의 목적은 흔히 오해하듯 국민을 통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권력의 괴물화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헌법과 법률이 권력통제라는 제 기능을 다하도록 돕는 일차적 책임은 변호사, 판사, 검사를 비롯한 법률가에게 있습니다."



2장 <국가란 이름의 괴물>


"국가와 정권은 분리되어야 할 대상"

- 정권은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국가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 국가를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는 의식 세계


- 국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국가를 '통제'하는 것


-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는 취임 후 일주일이 되기 전에 국회에서 긴급명령을 통과시켜 공산당이 소유한 모든 빌딩과 출판사들을 몰수했고,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을 해산시켰다


- 나치 통치의 근간을 이루었던 긴급 명령에는 민족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기본권을 폐지하고, 항구적인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법치주의를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른바 보호구금(Protective Custody) 제도도 이때 도입되어 영장 없는 체포가 가능하게 되었다. 보호구금이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판없이 투옥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가 공산당, 노동조합, 사회민주당 등 반대 세력을 완전히 격퇴하는 데 소요된 기간은 불과 3개월이었다.


- 많은 사람들이 나치 독일을 히틀러라는 미칭광이와 그를 둘러싼 몇 명의 극렬한 동조자들에 의해 벌어진 일회적이고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근본적으로 완벽한 시스템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참고도서 - <IBM과 홀로코스트>, 에드윈 블랙 


- 정신 나간 사람들 몇 명의 손으로는 이런 거대한 범죄가 이루어질 수 없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독재 권력의 전횡에 참여하거나 방관할 때에만 비로소 국가라는 괴물이 힘을 발휘한다.


- 프리모 레비는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 적어서 큰 위협이 되지 못하며, 정말로 위험한 존재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관료들"이라고 했다.


- 국가에 의해서 대량 학살 등의 범죄가 벌어질 때, 그에 관여하는 사람은 대개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구조자의 4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아이히만, 이오시프 스탈린,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가해자의 전형이라면, 오스카 쉰들러나 라울 발렌베리 같은 사람은 구조자의 모범이고, 대학살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방관한 연합국이나 동유럽의 주민들은 방관자로 분류할 수 있다. 


-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 http://en.wikipedia.org/wiki/Milgram_experiment#Results


* 이 주제가 자꾸 반복됨. 이 실험 자체가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이후에 실제로 사람들이 권위에 얼마나 쉽게 복종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디자인되었다. 한 참가자는 몇 년 후 베트남전이 벌어졌을 때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했다. 


While I was a subject in 1964, though I believed that I was hurting someone, I was totally unaware of why I was doing so. Few people ever realize when they are acting according to their own beliefs and when they are meekly submitting to authority… To permit myself to be drafted with the understanding that I am submitting to authority's demand to do something very wrong would make me frightened of myself… I am fully prepared to go to jail if I am not granted Conscientious Objector status. Indeed, it is the only course I could take to be faithful to what I believe. My only hope is that members of my board act equally according to their conscience…


이 실험 이후로 실험의 윤리성 논란이 일어 밀그램은 예일대를 떠나야 했고 더 이상 이런 충격적인 실험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 순종을 미덕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헌법 정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 공산주의 허용 여부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 '방어적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당헌, 강령을 가지고 있거나 정당 간부의 활동에 비추어 이를 인정할 수 있으면 위헌 정당으로 해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곧, 다른 자유는 모두 허용되지만 민주주의를 뒤집어엎을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굉장히 위험하다. 탄탄한 민주주의의 기반이 형성된 이후에는 공산당이라 해도 굳이 방어적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해산할 이유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사상의 자유이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이다. 방어적 민주주의는 알맹이가 빠진 민주주의의 껍질일 뿐이다. 


8장 <잃어버린 헌법, 차별받지 않을 권리>


- 개인과 개인 관계는 사법에 의해서만 해결하는 것이 한국 법 체계의 근간이다. 기본권 침해가 있을 경우 개인과 개인 관계에 대해서도 헌법이 직접 적용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기본권의 사인(私人)에 대한 효력'이라 해서 헌법의 중요한 논점의 하나로 꼽힌다.


- 학계의 다수 의견은 기본권 조항의 효력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 규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1) 사법에 의해서는 손해배상 청구 이외에 차별행위자를 처벌하거나 차별행위를 강제로 시정할 방법이 없다. 2) 민사 손해배상액이 너무 적다. 3) 차별 당한 사람에게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 발생과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 책임이 모두 지워진다.


대안으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 시정명령 도입 등이 논의되고 있으나...


- '국민들의 의식 개혁'이 중요하단 소리가 많이 나온다. 차별 금지 소송의 증가가 그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인권위 등에서 차별 금지 소송을 전담하는 분야를 둬야 한다. '전문 싸움꾼'들이 필요하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그가 에이즈에 걸렸고, 국무총리는 의료보험도 안 되는 동성애자이며, 백혈병을 피할 수 없는 오염된 쓰레기들이 바닥에 뒹구는 어딘가에서 자란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나라 대통령이 16살 때 낙태를 했으며, 마지막 애인은 에이즈로 죽었고, 눈을 감으면 자기 품에서 죽어간 애인의 모습이 늘 떠오르는 그런 여자였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냉난방이 안 되는 집에서 살았고, 병원에 가기 위해, 가족생활보조연금을 타기 위해, 고용안정센터에서 구직을 하기 위해 줄을 섰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실업자였고, 해고당했었고, 성적으로 학대당한 적이 있으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쫓겨난 적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고, 강간에서 살아남은 자였으면 좋겠다. 누군가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었고, 상처 입었으며, 많은 실수를 저질렀으나 거기서 교훈을 얻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나라 대통령이 흑인 여자이면 좋겠다. 그가 썩은 이빨들을 가졌으면 좋겠고, 병원에서 나오는 맛없는 식사를 먹어본 사람이면 좋겠다. 그가 마약을 경험해 보았고, 시민 불복종을 실천해 본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왜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대통령은 언제나 꼭두각시이며, 창녀의 고객이며, 결코 창녀 자신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믿게 한 건지 알고 싶다. 왜 그는 항상 사장이며 결코 노동자일 수는 없는 건지, 왜 그는 언제나 거짓말쟁이며, 언제나 도둑이고, 결코 처벌되지는 않는 건지 알고 싶다.” 


조에 레오나르드

120326 한국문학과 그 적들




*

조영일의 글쓰기 스타일은 단정적인 말투, 괄호 사용 남발, 잦은 비약 등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 어쨌든 나는 그가 의미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에서 느껴지는 바로는 필자가 상당히 성격이 급하지 않을까하는 의심이 든다. (ㅋㅋ)


*

문학을 보호해야 한다 / 8. 한국문하의 우울 / 8.1 문학과 국가 / 조영일


박금산의 <바디페인팅>(실천문학사, 2007)은 한국사회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젊은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구보씨 계열'로 분류될 수 있을 텐데, 이전의 구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소설가 자신의 치부를 까발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은 작가와 거의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어, 최소한의 허구적 장치마도 배제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주인공 '박금산'도 작가 '박금산'도 아니다. 노드롭 프라이리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작품은 '고백'이라기보다는 '아나토미(anatomy)'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얼마나 자신을 진실하게(있는 그대로) 고백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자신을 개념화시켰는지에 있다. / p. 204 (강조는 인용자)

* 노드롭 프라이리

한국문학시스템에서 시장의 후퇴와 국가의 등장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문학시장의 위축과 작가들의 생계위협 때문에, 부득이 국가가 문학판에 끼어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수치만 보더라도 문학시장이 이전보다 더 위축된 것 같지 않으며, 또 작가들의 생활 역시 과거부터 궁핍해졌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마 외적상황의 변화보다는 내적상황(예컨대 창작태도)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소위 '문학의 위기' 이전의 작가들은 '빈곤'을 감수해야 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던 것에 반해, 오늘날의 작가들은 '빈곤'을 근본적으로 문학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제는 더이상 작가가 일반인과 구별된 존재가 아니며, 그의 창작활동 역시 일반 회사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문학가들에게 '빈곤'은 이제 '시적 언어'에 도달하기 위한 단련과정이라기보다는 창작활동을 저해하는 장애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오늘날 작가들이 호소하는 '문학의 위기'는 이처럼 신자유주의(그리고 중심매체의 변화)에 의해 위축된 문학시장의 '가난(위축'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해온 '가난'에 대한 창작자의 변화된 감각에서 생긴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의 원인은 그동안 작가들에게 부여되어온 독특한 가치의 소멸에 있다 하겠다. 작가들은 더이상 시민적 생활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아가는 '길 잃은 시민(보헤미안)'(토마스 만)이 아니며, 기껏해야 시민의 대열에 보조를 맞추면서 그로부터 낙오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소)시민적 생활이란 동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든 사수해야만 성(城), 다시 말해 의무이자 권리인 셈이다.

문학가들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물질적으로는 시민을 자처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과거로부터 넘겨받은 어떤 우월감을 주장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의 우월감이란 적어도 일반시민의 노동과는 구별된 보다 근본적인 무엇이라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는데, 사실 이런 전제들이 없다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층 빈민이 아닌 문학가들에게 투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학가들의 이런 모순된 자기규정이야말로 한국문학의 마지막 생존 기반이자 문학과 국가의 행복한 동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바디페인팅>이 왜 소설가의 '우울'을 문제 삼는지는 자명하다. 자유로워야 하는 문학이 국가기금의 포로가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양가감정(분노와 고마움) 때문이다. ...  

8-2 투명문학의 꿈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은 '고백'이 아니라 '아나토미'다. ...

황현산은 작가의 이상한 염결성(자신을 투명하게 만들려는 욕구)이 사회-윤리적 의지(또 하나의 삶을 향해 말을 건넴)와 굳게 맞물려 있다고 보는데, 여기서 '이상한' 염결성이라 함은 타인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다른 말로 수치심을 도려내는 것이다.

... <바디페인팅>은 오늘날 한국의 소설가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음울한 현실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우스울 뿐만 아니라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쾌함은 매우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조차 '비현실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 어느 수준을 넘어선 객관묘사는 도리어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유머는 이런 객관화의 극단적 표상행위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역전을 뜻한다. ... 유머(경쾌함)는 역으로 무언가를 현실적이지 않게(보이지 않게) 해소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와 같은 염결성이 은폐(해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바디페인팅>에서의 유모는 완전한 자기폭로(자기투명화)에서 생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거리감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는 내면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수치심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결코 획득될 수 없는 것이 유머라는 말이기도 하다. 

8-3 잉여로서의 빈곤

... 근대문학에서 '빈곤'은 매우 중요한 테마이다. ... <바디페인팅>은 자본에 저항하는 문학가라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문제(빈곤)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이 같은 물음은 어쩌면 우문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는 '빈곤'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빈곤은 존재하지 않고 빈곤에 대한 '두려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8-4 우울과 비아그라 (재밌음. 너무 길어서 안 옮김)

8-5 유토피아와 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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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을 지나치게 낭만화 하는 것 아닌가. Climbing out of poverty by your own efforts, that is indeed something on which to pride yourself, but poverty itself is romanticised only by fools.

*

문학가들의 변화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은 비겁한 수사라고 생각함. 하지만, 글을 읽다 순간적으로 짜증나는 대목이 있다면 발언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인식은 못하지만 그 사실이 치부를 찌르기 때문이다. 분간하는 건 곰곰히 생각해보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짜증 수준에서 멈추면 다다를 수 없는 곳이지만.

 

120126 그대로 두기 / 다이애나 애실 中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자서전을 읽으니 시대상을 엿보는 재미가 있어 앞으로 좀 다른 시대의 자서전을 챙겨볼까 한다. 이 책에는 더불어 작가 소개까지. 

*

# 지타 세레니Gitta Sereny의 <그 어둠 속으로 Into That Darkness>

- 번역본 없음 http://www.amazon.com/Into-That-Darkness-Examination-ebook/dp/B005C2SOUY/ref=ntt_at_ep_dpt_1  
- 요즘 계속 이 '악의 평범성' 얘기를 마주치게 된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56615 

  <그 어둠 속으로>의 보급판 1쇄 서문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몇 개월 동안 이어지고, 그때까지 알려진 적이 전혀 없었던 폴란드의 집단 학살 수용소를 탈출한 소수를 비롯해 생존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이들이 경험한 공포의 실상이 하나둘씩 밝혀지자 나는 겉보기에 멀쩡한 인간들이 어쩌면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싶은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졌다." ... 그녀는 ...  "이와 같은 만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의 성격을 적어도 한 명 이상 분석해야 한다. 선입견을 배제한 채 그의 성장 환경과 어린 시절, 성인이 된 이후의 동기와 반응을 평가할 수만 있다면 인간의 만행에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은 어디까지인지, 사회와 환경이 미치는 영향은 어디까지인지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지타 세레니가 주기적으로 인간의 만행을 다루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인간의 만행에 치를 떤 사람이라면 이처럼 통렬한 깨달음 속으로 충분히 빠져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모든 것은 인간 내면의 어둠과 싸우려는 충동의 소산이고, 인간의 사악한 면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 같은 싸움의 일부분이다. 사실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이 만행과의 전쟁에 많은 힘이 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끔찍한 사건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공포와 경악은 흥분을 위장하는 수단으로 종종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타락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마저 거부한다면 희망이 사라지는 것 아닐까? ... 
 이후 기자로 변신한 그녀는 1967년에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나치 전범 재판을 비롯한 서독 관련 기사 담당자로 내정이 되어 프란츠 스탕글Franz Stangl의 재판에 참석했다. 스탕글은 폴란드에 건설된 네 군데 집단 학살 수용소 중 하나였던 트레블린카의 지휘관이었고, 그곳에서 90만명의 학살을 공동 주도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그대로 두기, p. 65~ 


# V.S. 나이폴Naipaul p. 175

- 서인도제도West Indies 트리니다드 섬 출신 인도인계 작가. 영국 제국주의와 식민지민의 생활을 주제로 집필. 트리니다드 섬 안에서의 인종 간 반목 (흑인 대 인도인) 
- 노벨상 수상자라 그런지 역시 번역이 짱짱하게 되어있음 (-_ -)  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AuthorSearch=V.S.+%B3%AA%C0%CC%C6%FA@59885&BranchType=1 
- 본 책에 묘사된 식민지 출신 작가의 열등감과 우월감...에 의한 작가의 삶이... 이 챕터 재밌었음. 묘사가 하도 히스테릭하길래 사진을 찾아봤더니 아저씨 인심 좋게 생기셨는데... 여성 작가 비하 발언을 보나 애실의 <게릴라>에 대한 묘사를 보나 비호감"비디아스럽"긴 하다. 별로 안 보고 싶다! 미겔 스트리트 정도는 읽어줄 의향이 있음. 흥. ㅎㅎ 


# 몰리 킨 Molly Keane

- 역시 미번역. 대신 킨들 버젼  http://www.amazon.com/Good-Behaviour-ebook/dp/B005AVIWO0/ref=pd_rhf_ee_p_t_2 
- 다른 것보다 작품 설명이 흥미로웠다. <품행 방정Good Behavior>라는 블랙 코미디. 
- 몰리는 1905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다이애나 애실은 1917년생. 

 ... (그녀가 이전 소설들을) 필명으로 발표한 이유는 소설을 쓸 만큼 똑똑한 여자와 춤추고 싶어 할 남자가 없기 때문이었다(똑똑하다는 표현이 사람을 얼마나 움츠러들게 만드는지 온몸으로 실감하려면 '시골'에서 자라봐야 한다. "참 똑똑하시네요, 안 그래요?"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움찔한다.) ...
 <품행 방정>의 진정한 매력은 몰리가 난생처음 선보인 기발한 수법이다. 즉, 독자들을 공저자로 끌어들이는 작전이다. 이 책의 화자...는 쌀쌀맞고 우아하며 딸을 너무나 지겨워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덩치 좋고 둔할 딸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기 자신조차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에 독자들이 알아서 해석을 해야 한다. ... 품행 방정의 제1법칙은 <......하는 척>이기 때문이다. 행실이 바른 사람은 무서워도 용감한 척해야 한다. 가난해도 돈이 있는 척해야 한다. 남편이 난봉꾼이더라도 아닌 척해야 한다. (생략 - 게이인 오빠의 남자친구가 부모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주인공을 좋아하는 척하자 주인공이 자신을 정말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내용) ... 이런 식의 흥미진진한 기법은 끝까지 계속되는데, 어떤 대는 30페이지가 지난 뒤에야 퍼뜩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몰리는 이 책을 가리켜 '블랙 코미디'라고 했고, 실제로 기발하게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그녀는 한 집단 특유의 행동을 면밀하게 관찰하는데, 그 부조리를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출할 작가는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방정한 품행의 이면에 무엇이 있고 그것이 어떻게 족쇄로 작용하는지 빤히 아는 슬픈 인생에서 비롯된다. / 그대로 두기, p. 201 ~ 


 

110625 배수아 당나귀들

<당나귀들>/ 배수아

p.11 신념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의 정신적 경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

p.29 이성 없이 살찜을 선택한 역사가 그대로 내 안에서 나날이 그렇게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야!

예술이란, 어떤 견해에 의해서라면,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거야. 그 중의 하나는 지금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칭송해. …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직 그것이 스스로가 추구하는 존재의 반영으로서만, 슬프지만 실패할 것이 분명한 그 끝없는 추구의 도정에서만 머물기를 원하는 것들이야. 그것이 추구하는 영역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이 멀고도 고귀해서 그 누구도 지상의 손길과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로 그 자신이 구제 불능의 장님이며 ‘이제 이루었다!’라는 환희의 선언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기 때문이기도 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가고 있지.그런데 누군가 길을 막고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하고 묻는다면 ‘나는 눈멀고 귀먹은 어리석은 당나귀요, 나는 내가 이룬 것이 아니요, 나는 내가 가진 것도 아니며 단지 내가 추구하는 것이지요.’하고 대답하겠지. 그가 쫓는 것은 아마도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어쩌면 영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고 그가 최대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추함’정도 겠지.

내 생각에, 너는 그냥 예술의 이상화된 아마추어리즘을 극단적으로 미화하는 거라는 느낌이 든다. 아마 그러고도 싶겠지. 왜냐하면 네가 거기서 발을 빼기 싫어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또 영원히 도달할 수도 없을 운명인 그런 몽상적 아름다움에만 가치를 부여한다면, 궁극의 가치를 오직 그렇게 추상적인 것에만 둔다면, 여기 현상으로 분명히 자리 잡고 있는, 살고 사랑하고 슬프고 격렬한, 이 인간의 직접 실존은 도대체 다 무엇이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세월을 성장하고 마침내 피어난 그런 예술들은 다 무엇인지, 

T의 반박을 듣게 되자 나는 들뜬 열정의 벼랑 위에서 바로 현실의 바다로 낙하해 버린 가마우지 꼴이 되어 바로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난감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바로 ‘말 더듬는 상태’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은 몽상의 시작이야. 그러나 나는 삶이 몽상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네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어. … 적어도 나는 가능한 한 최경계에서 작업하고 싶어. 이미 완성된 문법과 처녀지 사이에서. 

p.241

그 책은 작가의 상상력을 사색력과 결합해서 아주 유연한 솜씨로 흥미로운 스토리를 에세이의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도록 만든 것으로 보였다. 어쨌거나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경계를 넘어선 글’의 작가였다.

p.249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언제나 그녀 자신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수진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스스로를 충분히 오만하다고 느꼈으며 그 사실이 가슴이 벅차도록 통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거리의 모퉁이마다, 카페마다, 식당마다, 극장마다, 역의 플랫폼과 금요일의 디스코마다, 건널목의 신호등마다 심지어는 학교의 학부모 모임과 홍등가에서도 그녀와 똑같은 벅찬 가슴을 펴고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시아 출신의 여자들,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을 단 1초만 흘끗 스쳐 보기만 해도, 그들이 수진과 너무나 같다는 것을, 너무나 같은 이유로 떠나왔으며 너무나 같은 이유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손에 여권과 다른 한 손에 비행기 티켓을 움켜쥔 현대판 여전사들의 군대가 전 세계의 거미줄 같은 실시간 항공 노선을 따라 오만에 가득 찬 눈빛을 창처럼 앞세운 채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수진은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박살 내지 못하는 유람 부인에 머물고 말리라.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쓰지 못하리라. 사실 그녀는 여권과 티켓을 손에 움켜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며 자존심 상하게도 고향에서 송금까지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니던가. … 

p.251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이 나를 감동시켰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막대한 유산상속을 포기했고(그가 보통 일반적인 선으로 생각되는 대로 자신 몫의 유산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든지 하는 자선의 행위조차 피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공리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돈이 있어야 행복해지고 정신적 업적도 이룰 수 있다는 범속한 상식에도 반대한 듯이 보인다) 시골의 무지한 농부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진해서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문학이나 예술, 위대한 정신도 갖추지 못한 작고 가난한 마을 트라텐바흐의 교사로 간 일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 그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삶의 곤궁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교육을 좀 더 나은 삶의 수단으로 제공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학생들에게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그의 연인이자 천재 수학자 프랜시스를 기계공이 되게 했듯이 트라텐바흐에서는 농부의 아이들에게 정신의 진보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고 그는 트라텐바흐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만 받은 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생의 한가운데, 검은 당나귀 / 루이제 린저 

느림 / 쿤데라

가자에서 눈이 멀어 / 헉슬리

+ 요즘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 것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도대체 어떻게?

110514 Humpty Dumpty

  “I don’t know what you mean by ‘glory,’ ” Alice said.
    Humpty Dumpty smiled contemptuously. “Of course you don’t—till I tell you. I meant ‘there’s a nice knock-down argument for you!’ ”
    “But ‘glory’ doesn’t mean ‘a nice knock-down argument’,” Alice objected.
    “When I use a word,” Humpty Dumpty said, in a rather a scornful tone, “it means just what I choose it to mean—neither more nor less.”
    “The question is,” said Alice, “whether you can make words mean so many different things.”
    “The question is,” said Humpty Dumpty, “which is to be master      that’s all.”
    Alice was too much puzzled to say anything, so after a minute Humpty Dumpty began again. “They’ve a temper, some of them—particularly verbs, they’re the proudest—adjectives you can do anything with, but not verbs—however, I can manage the whole lot! Impenetrability! That’s what I say!”
http://en.m.wikipedia.org/wiki/Humpty_Dumpty 

101212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하얀 스킨이 땡겼는데 오 마침 예쁘다아아 하얗다.
대신 사이드바가 없어서 플리커 스트림이 날라갔지만... 일단은. 너무 예쁘니까 +_+
짧게 쓰면 화면이 안 이쁘니까 길게 쓰고 싶지만 나는 부족하니까 남의 말 뒤에 숨자.
읽고 읽고 다시 읽어도 가슴에 사무치는 글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학이 이런 것이라서 그토록 아껴왔거니와, 시정의 의론(議論)들이 아무리 흉흉해도 나는 문학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 이 불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 오로지 나의 삶을 나의 글로 덮어버리기 위해 썼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면서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신형철,『몰락의 에티카』


부르디외


왜 이리 멋있노 미친 부르디외 -.,-


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새물결, 2005


p. 64-5

... 결국 이러한 성향은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련의 지각도식과 평가도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영역에도 이항가능하며, 따라서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다른 문화적 경험들도 이와 비슷한 태도로 대하도록 하며, 각 경험을 상이하게 지각하고, 분류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똑같은 영화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버트 랭커스터가 나오는 서부영화'라고만 이야기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존 스터케즈 감독의 초기작품' 또는 '샘 펙킨파의 최신작'이라고 말한다. 이때 어떤 부분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따라서 제대로 영화를 보는 올바른 방식을 정할 때, 각자는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계급 전체("그 영화 봤니?"나 "그 영화는 꼭 봐야 돼"하는 식의 말을 통해 지침을 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각 집단에 의해 정통적인 분류방법과 거명할 만한 예술적 향유에는 반드시 따라다니게 되는 담론을 생산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비평가 집단의 협력을 통해 지침을 얻는다.

따라서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문화적 실천들이 학력자격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변화하는 이유 또한 이런 식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 즉 여기서 학위나 미적 성향, 즉 정통 문화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항상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여러가지 요구사항 중 가장 철저하게 요구되는 미학적 성향을 획득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구성하는 조건이 나타나게 된다. ... 대략 학력자격이 미학적 성향을 몸에 익힐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부르주아적 혈통이나 아니면 전에 오랜 기간 학교에 다녀야 비로소 습득할 수 있는 준-부르주아적 존재양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특히(가장 흔하게는) 이 양자가 결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p. 67

파노프스키는 예술작품에 스콜라철학적인 의미의 '의도'라는 개념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 다시 말해 기능이 아니라 형식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다른 대상과 구분될 수 있다. ... 그렇다면 결국 기술적 대상의 세계와 미학적 대상의 세계 간의 구분선은 생산자들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인가? 실제로는 이러한 '의도' 자체가 이미 사회적 규범과 관습의 산물로, 이 양자가 결합해 항상 불안정하고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기술적 대상과 예술적 대상의 경계선을 규정한다.

... 오늘날 미적 지각 양식은 '순수한' 형식을 획득했지만 이 형식 자체가 이미 예술 생산 양식의 특정한 상태에 조응하고 있다. 기능에 대한 형식의 절대적 우위, 즉 재현되는 대상에 대한 재현양식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는 예술적 의도에서 생겨난 예술, 예를 들어 인상파 이후의 회화들은 이전의 예술이 조건적으로만 요구했던 순수 미적 성향을 정언적으로 요구한다.


p. 70

'과시적인 소비'의 단순 소박한 과시욕, 다시 말해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사치품을 조야한 방식으로 과시함으로써 남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과시욕은 순수한 시선의 독특한 능력, 즉 '인물' 자체 안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근본적 차이에 의해 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을 범인과 구분시켜주는 준-창조적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구 아저씨 말 참 잘하셈) 카리스마적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비대중적이고 실로 반-대중적인 예술" 그리고 또 예술의 "대중을 두 개의 '적대적인 카스트 계급', 다시 말해 이해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기묘한 사회학적 효과"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강화되는지를 보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읽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는 계속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것은 곧 일부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지 못한 이해 기관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시 이것은 곧 일부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인종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은 낭만주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별난 재주를 가진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문득 새로운 예술 양식의 변화는 이미 대중화되어버린 예술 양식에 반하여 또 다시 별난 재주를 가진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 양식을 개발하려는 시도의 반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면 대중 미학은 학문적 미학에 대한 거부인가 아니면 단순한 학문적 미학의 결여일 뿐인가?



p. 77


반대로 대중적 오락물은 관객들이 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 기회를 이용하여 축제적인 분위기에 집단적으로 끼어들 수 있도록 해준다. ... 이것들이 한층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무대장식의 화려함과 휘황찬란한 의상... 등 집단 축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화려한 구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 모든 형태의 코믹물 특히 '위대한 사람들'을 풍자하고 패러디함으로써 희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모든 형태의 희극들과 마찬가지로 ...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만족감을 주며 다시 이것이 사회 세계를 전복시키고 실천과 예의 범절을 뒤집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미적 이화효과(異化效果)

이러한 대중적 반응은 심미주의자의 초연함과는 정반대되는데, 이들은 (서부 영화나 만화와 같은) 대중적 취향의 대상 중의 하나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할 때면 언제든 분명히 드러나듯이 반드시 '즉각적인 지각'에 대해 탁월함의 척도로서 일정한 거리, 격차를 끌어들인다. 즉 '내용', 등장인물, 플롯 등으로부터 형식, 특히 예술적인 효과 쪽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려놓는다. ... 초연함, 무관심함, 공평무사함 -- 미학이론은 흔히 이러한 속성을 예술작품을 있는 그대로, 즉 자율적이며 자립적인 상태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실제로는 관심의 부재, 굳이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심함과 무관심, 다시 말해 스스로 달려들어 진지하게 검토하길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망각되고 만다.

...

어떠한 참여나 연관도 거부하는 태도, 안이한 유혹이나 집단적 열병에 '통속적으로' 몸을 맡기길 거부하는 태도(최소한 간접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형식적 복잡함이나 대상없는 재현을 선호하는 취향의 기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는 회화에 대한 반응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사진으로 찍으면 아름답게 나오겠느냐는 질문에 대중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통상적인 대상들 중 최초의 영성체나 일몰, 풍경 등을 '통속적이거나 추하다'고 거부하거나 '시시하고', 약간 '바보 같다'거나 '짜증나게 만든다'거나 또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빌리자면 조야하게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또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고 공인된 것들도 예를 들어 공사장의 철골구조나 나무껍직, 특히 양파 등의 시시한 물체들 또는 자동차 사고라든가 (렘브란트를 암시하기 위해 고른) 정육점의 고기 자르는 선반 혹은 (브알로를 연상시키기 위한) 뱀처럼 추하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나 예를 들어 임산부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되는 대상을 갖고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진이나 더욱 진짜 같은 사진을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재현 대상으로부터의 재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사람의 비율도 늘어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p. 86

(자갈을 찍은 사진에 대하여 저건 부르주아적 사진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노동자) 각주 35) 이와 관련하여 '대중' 미학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필연적으로 지배자들의 미학과 관련해 끊임없는 재규정을 요구하는 피지배자들의 미학이라는 점을 망각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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