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03 폴리나
Bastien Vives 관련 포스팅 http://mousefeed.blog.me/110154026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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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이 사람 만나보고 싶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17212153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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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알렉세이에게 폴리나가 이렇게 말하죠. <춤은 복잡하지만, 이건 간단해.> 이 말이 주제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폴리나는 선택을 하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플랫폼에 남아 있지만 폴리나는 베를린행 기차를 탔고, 바로 그곳에서 모든 일들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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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바탕화면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그는 이번 휴가에 대해서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고, 동료중 누구에게도 일부러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그저 말을 안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수수께끼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잿빛 일상에 피부색까지 물들어 가고 있는 그들을 약올리기에는 더없이 유효한 방법이었다. 회색 종족은 자기 이외의 인간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초록이든, 회색 이외의 색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에 빠진다. (95면)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15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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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펼치게 된 독자들은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된 그 남자처럼 온 몸을 죄어오는 느낌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이상 출구는 없다는 생각이 분명해지지만 그렇다고 책장을 덮어버리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 책 읽는 동안 내 느낌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문구. 평소 같으면 50면 정도 읽고 던져뒀을 텐데 아침에 읽기 시작해 오후 네시에 끝을 보고야 말았다. '재미'가 있어서라기 보다 정말 모래 구덩이에 갇힌 느낌이었다. 분명 에로틱한데 짓눌린 느낌이다. (기껏 크리스마스 이브에 읽은 소설이 이거라니...)
"읽다보면, 왜 읽고 있는지 영 모르겠는 소설책이 있다. '이걸 꼭 읽어야 할까?'는 생각이 들면서도 끝내는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나름대로 재밌는 소설책들. <모래의 여자>도 그런 소설책 목록에 들어갈 만하다. 보통 그 계통 소설들이 그렇듯 <모래의 여자>도 뜬금없는 설정에 황당무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12세기 아라비의 거대한 저잣거리에서는 버려도 아깝지 않을 가방 하나와 돈 보따리 하나를 짊어지고 제대로 찾아가기만 하면 간혹 밀화인蜜化人이라 불리는 물건을 입수할 수 있었다. 다른 말로 '인간 미라 밀과'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름으로만 보면 꿀에 절인 중동지방의 일반 밀과처럼 디저트로 나오는 음식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밀과는 외용약으로 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내복약으로 투약했다.
조제에는 물론 조제자의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뿐 아니라 특이하게도 내용물이 될 사람 자신의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아라비아에서는 70~80세 되는 노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바치기도 한다. 이들은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 목욕하고 꿀만 섭취한다. 한 달이 지나면 꿀만 배설하게 되고(대소변이 완전히 꿀이다) 그 뒤 사망한다. 동료들은 그를 꿀로 가득 채운 석관에 재워놓고 봉인한 후, 겉에다 몇 년 몇 월에 봉인했는지를 표시한다. 100년이 지나면 봉인을 뗀다. 그러면 밀과가 만들어져 있는데, 사지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났을 때 치료약으로 이용한다. 소량을 내복하면 즉시 증상이 가신다."
위 조제법은 중국의 뛰어난 박물학자 리스전이 1597년에 편찬한 <본초강목>에 나온다. 리스전은 밀화인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고 조심스레 단서를 붙였다. 이 단서로 인해 마음이 불편해지게 되는데, 그가 <본초강목>에서 의심을 품지 않은 구절들은 사실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중국에서 사람의 비듬(뚱뚱한 사람 것이 가장 좋다), 사람의 무릎 때, 사람 귀지, 사람의 땀, 낡은 북의 가죽(태운 재를 음경에 바르면 오줌 막힌 데 좋다), 돼지 똥에서 짜낸 즙, 나귀 꼬리의 몸 쪽 부분에 붙은 때 등이 약으로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확실하다.
<인체재활용/메리 로치, 256면>
인용한 부분이 약간 로맨틱하다고 느꼈다면 지나치게 악취미인가.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바치기도 한다"라니. 소설 소재로 좋을 것 같음.
121223 둘로스, 박경숙 첼로 앨범
공연이 열린다는 소극장은 모텔이 늘어선 종로 뒷골목에 있었다. 운이 안 좋다면 치한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골목이었다.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자 거짓말처럼 아담하고 깔끔한 호텔이 나타났고, 소극장은 그 지하에 있었다. 가겠다고 한달 전에 말해둔 탓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간 참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 없어도 다를 것은 없었다. (이런 일의 대부분이 그렇다. 꼭 내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 '꼭 필요한 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집합체가 필요하다.) 뒷풀이를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서점에라도 들러서 잠시 숨을 돌려야겠단 생각에 잠시 어디 들렀다 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노트라도 가지고 나왔다면 카페라도 갔을 텐데, 술을 마실 작정을 하고 지갑과 핸드폰만 들고 나왔더니 카페에 가기도 애매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라도 달아볼까 하는 마음에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찾았지만 작은 내 방에 두기엔 너무 큰 것밖에 없었다. 목적을 잃고 두리번거리던 참에 음반 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글렌 굴드가 눈에 들어와 다가갔고 이내 점원이 말을 걸어왔다. 점원은 친절했다. 여자는 이것저것 권해주며 자기의 선호도나 감상을 말해주고 남자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녀가 설명해주는 앨범을 틀었다. 파블로 카잘스의 무반주 첼로 조곡과 그녀가 추천해준 박경숙의 첼로 앨범 가운데 고민하고 있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겨울에 무반주 첼로 조곡은 좀 외롭죠. 반면 이 앨범은 라흐마니노프가 들어있어 따뜻하기도 하고 녹음 상태도 아주 좋아요. 지난 주에 나간 OO공연에 판매를 나갔는데 음악하시는 분들이 이 앨범을 아주 많이 사가셨어요. 첼로와 피아노가 함께 하는 편이, 덜 외롭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까요."
엘라 피츠제럴드의 초기 앨범을 집어들자 매대 뒤에 서 있던 남자는 작지만 믿음직스러워보이는 오디오로 엘라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앨범 케이스가 틴 재질이라 아주 귀여웠지만 며칠 전에 재즈 앨범을 잔뜩 산 탓에 그 앨범을 사기는 좀 꺼려졌다. 파블로 카잘스와 박경숙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박경숙을 고르고, 생뚱맞게 '천년의 왈츠'라는 아주 촌스러운 커버의 앨범을 샀다. 추천해주는 여자가 믿음직스럽기도 했고 2CD 구성인데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왈츠곡만 모아놓은 거라고 했다. 남자가 때맞춰 대중적이고 내가 아주 좋아하기도 하는 왈츠곡을 틀어주는 바람에 엉겁결에 박경숙과 천년의 왈츠 앨범을 사고 말았다. 늘 이런 식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현악기로 연주한 버전도 여자가 추천해줬지만 차마 '전 첼로나 콘트라베이스(한마디로 저음역을 담당하는 현악기들)를 제외한 현악기가 싫어요'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글렌 굴드를 며칠 전에 샀으니 카잘스를 샀으면 좋았을 텐데. 아침에 어울리는 무반주 첼로. 천년의 왈츠를 카잘스로 교환하고 싶지만 이미 뜯어버렸다.
핫트랙스에서 이런 서비스를 받다니 뭔가 감동. 그러니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듯이 음악을 좋아해서 핫트랙스에 취직한 사람도 있는 걸 텐데. 어쨌든 이렇게 좋은 추천을 받을 수 있다면 오프라인 매장을 더 자주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서가를 어물쩡대다가 세계문학전집 할인을 하기에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샀다. Y 언니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책을 열권 사면 그 중에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책 한권 찾기가 아주 힘들다. 예전에 교보에서 이렇게 어슬렁대다가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산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같은 행운이 따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니 씨네21을 사려고 일부러 잡지가 있는 계산대에 줄을 섰는데 정작 계산할 때는 잡지를 달라고 하는 걸 까먹었다.
생각보다 가까워보이는 거리에서 뒷풀이를 하고 있었지만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실 기분도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나니 갑자기 뱅쇼가 마시고 싶었다. 집에 남은 와인은 있었고, 검색을 해보니 필요한 건 시나몬 스틱, 정향, 오렌지, 레몬. 시나몬 스틱은 시나몬 가루로 대체하기로 하고 정향 따위는 필요 없다. 마트에는 오렌지도 레몬도 없었지만 자몽이 있었고, 수입맥주를 다섯병에 만원에 팔고 있었다. 토마토와 자몽, 산미구엘을 비롯한 맥주 다섯병, 육포와 밀가루(갑자기 피자를 만들고 싶었는데 또띠야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집에 와서는 의욕을 상실하고 남은 건 강력분 1kg.), 우유를 샀다.
집에 와선 새우-토마토-바질 수프(라고 하긴 어렵지만)를 끓였고, 뱅쇼를 끓였다. 한병을 통째로 끓이는 레시피의 '50분간 끓여라'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바람에 반병도 안 되는 남은 와인은 다 공기 중에 날려버리고 말았다. 결국 미니 와인을 한병 더 열어 끓였고, 그마저 컵에 따라보니 반컵밖에 되지 않았다. 반컵을 마시고 나니 감칠맛이 나 결국 편의점에 가서 와인을 한병 더 사왔다. 술을 하루에 여섯병이나 사다니.
어쨌든 집에 와서 들어보니 박경숙 앨범은 예상한대로 좋고(라흐마니노프가 따뜻한지는 잘 모르겠다), 천년의 왈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블로 카잘스를 살 걸 그랬다. 아니, 아무래도 겨울에 첼로 조곡은 외로우려나. 그래도 '천년의 왈츠'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며칠전에 무려 '책 판 돈'으로 산 재즈 앨범 30장 박스 세트는 아주 만족스럽다. 케이스도 귀엽고 나같이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나하나 감상하기 좋다. 아무리 MP3 다운로드가 쉽고 편하더라도 물질성 있는 CD의 만족감은 비길 게 못 된다. 지금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포트레잇 인 재즈> 재생 중. <왈츠 포 데비>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좋다. 그나저나 박스 세트를 사는 바람에 <왈츠 포 데비>는 두장이 생겼으니 한장을 누굴 줘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