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금정연, 신형철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

[프레시안 books]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김사과 소설가 


"다시 윤리로 돌아와서, 그런데 왜 우리는 문학에 대해서 말할 때 윤리를 말하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요즘 문학가들이 문학에 대해서 말할 때 윤리를 말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할 때이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문학의 영향력은 보잘것없이 축소되었다. 문학은 학교의 권위로 연명하며 소수의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살롱 문학과 평범한 사람들의 여가 시간을 채워주는 대중(상업) 문학으로 양분되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문학으로 지칭하는 것은 전자이고, 그런 전자의 문학이 대중(상업) 문학과 자신의 차이점을 내세울 때 호명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윤리다. 그것이 다른 하찮은 글과 문학을 차별화 시켜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문학에 있어 윤리가 일종의 알리바이로 쓰인다는 의혹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문학적 인간들이 제발트의 글에서 이 시대에 흔치 않은 문학의 흔적을 보면서 열광하는 것은, 거기에서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흔치않게 세련된 알리바이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지식인/예술가를 주제/관객으로 다루는 홍상수의 영화가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짐승은 되지 말자'며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사태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 시대의 윤리란 사회적 급진성을 잃어버린, 더 정확히 말해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어떤 분야/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는 알리바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장되는 문학적인 윤리란 무엇인가? 제발트의 글을 통해 유추하자면 그것은 잊힌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파국의 풍경에서 통증을 느끼고, 결국 여행의 끝에 진짜로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윤리는, 엄청난 예민함에서 비롯된, 마비시키는 윤리다. 중단시키는 윤리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트의 글은 소설과 에세이, 허구와 비허구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글 더미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의 윤리가 무언가가 되기를, 어딘가로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광기가 우리 모두를 이런 폐허의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그것을 막으려는 의지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것이 전후의 지적/예술적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 회의주의다.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인 회의가 해체와 거부를 거쳐 마비로, 그러니까 완벽한 교착 상태로, 귀결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아무데도 갈 수 없다.


그런데 이 비탄에 빠져, 아무데도 갈수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마음을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그건 이 회의주의를 가져온 원인 세계를 망각한 채로, 회의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일종의 종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혹은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며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윤리의 결과물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 윤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학뿐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데도 이르지 못하지만 오직 문학이 되게 하는 윤리. 그것은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신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문학에 대한 열광으로 전도시키는, 지극히 낭만적인, 마음의 구조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1111134117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 '소녀의 외침' 이후!

[親Book] 김사과의 <테러의 시>

금정연 활자유랑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302125916


"물론 그들은 '어른'이고,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관의 대립을,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비평 게임을 통해 문학적인 것의 자장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녀의 소설들은 안전하게 소비된다. 그 모든 외침과 분노와 항의는 젊은 작가의 개성적인 목소리로 환원되고, 그것은 우리 문학이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다양성의 훌륭한 사례가 된다. 그 속에서 그녀는 '당돌한 아이'가, '무서운 신예'가, '문단의 테러리스트'가, '쾌활한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억울하고 또 분한 일일 것이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믿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면, 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것.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쳤을 때,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초월적인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한다. 이 판단은, 이성을 믿으라는 아버지의 말, 마음속의 일들은 이성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말 중 어느 것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2588/p/1

First Aid Kit - King of the World




First Aid Kit - King of the World 


At ten in the morning 

I was laughing at something 

At the airport terminal 

At nine in the evening 

I was sitting crying to you over the phone 

Well passing the border from a state to another 

Filled with people whom I couldn't help to relate to 

And we stopped a while at a roadside restaurant 

Where the waitress was sitting outside smoking in her car 

She had that look of total fear in her eyes 

And as we drove away from there she looked at me and 

She smiled 


I keep running around 

Trying to find the ground 

But my head is in the stars 

And my feet are in the sky 

Well I'm nobody's baby 

I'm everybody's girl 

I'm the queen of nothing 

I'm the king of the world 


And once you asked me well what's my biggest fear 

That things would always remain so unclear 

That one day I'd wake up all alone 

With a big family and emptiness deep in my bones 

That I would be so blinded, turn a deaf ear 

And that my fake laugh would suddenly sound sincere 


Now I wasn't born for anything 

Wasn't born to say anything 

Oh I'm just here now and soon I'll be gone 

I'm nobody's baby 

I'm everybody's girl 

I'm the queen of nothing 

I'm the king of the world 


Now everyday there's a short intermission 

While I sleep they start dimming the lights 

But I've seen everything I ever want to see 

Screaming "Fire!" in a theater people taking their seats 

Watch it all go down like a stone in a stream 

If you fall for your reflection you will drown in a dream 


Tell me something real 

Tell me something true 

I just want to feel there's something left that I can do 

But I'm nobody's baby 

I'm everybody's girl 

I'm the queen of nothing 

I'm the king of the world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주빈 메타



주빈 메타Zubin Mehta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Bayerische Staatsoper


130118 오필리아


Ophelia, John Everett Millais, 1851–2, Oil on Canvas


The Way Home, Life and Death in Hackney, Tom Hunter, 2000, Cibachrome print


Melancholia, Lars von Trier, 2011



밀레이는 이 작품을 위해 잉글랜드 서리 근교의 호그스밀(Hogsmill) 강가에서 넉 달 동안 머무르며 그림의 배경을 그렸다. 여기에는 수십 종의 다양한 식물과 꽃들이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각각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버드나무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강을 묘사한 부분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버림받은 사랑'이라는 상징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 자라난 쐐기풀들은 고통을 의미하며, 데이지는 순수, 팬지는 허무한 사랑, 제비꽃은 충절을 암시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양귀비는 유난히 강조되어 있다. 또 그림 오른편 나뭇가지는 해골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 오필리아의 모습은 배경을 완성한 후 런던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l)이란 여성을 모델로 그렸다. 그녀는 강물에 빠진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안에 누워서 포즈를 취하였다. 욕조의 차가운 물은 램프로 데웠는데 램프의 불이 꺼져 그녀가 심한 감기에 걸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밀레이에게 병원비와 치료비를 대지 않으면 법정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모델인 엘리자베스 시달은 나중에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rbriel Rossetti)의 아내가 되었다. 

 오필리아 | 두산백과


LIFE AND DEATH IN HACKNEY:

This series puzzles the mind as much as it excites the eye. More overtly than other series, these images convey a bleak outlook, but one which is familiar and fair, and broadly resonant with today’s society. Subjects are shown in soporific states, or role-playing ‘death scenes’, and these are located in overgrown fields, wasteland, or graveyards. In fact, subjects do not always dominate these particular frames. Indeed, so much of their environments have been included that emphasis is shared with the placement as much as the person. This assists the ethereal, or ‘other-worldly’, quality to the frames as the wild, untouched-looking country found in Hackney seems apocryphal and ‘dream-like’, despite its contemporary reality. In a sense this series suggests Hunter is, among several other roles, an unusual chronicler of contemporary, urban Britain.

Tom Hunter


마지막 물음을 던지자. 영화 대단원에서 우리 대부분이 느낀 저 불길한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지 아름다운 영상의 속임수일까? 혹은 저것은 영화일 뿐이라는 안도감?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이 영화에서의 종말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 이 세계의 모든 불행과 비참이 철저히 차별적인 데 반해 이것은 모두에게 완전히 평등한 종말이고, 타협적으로 희망을 남기는 여느 종말 서사들과는 달리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지 않는 깨끗한 종말이다. 이렇게, 모두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필사적으로 이 세계의 종말을 막아야 할 간절한 이유가 과연 얼마나 있는 것일까? 영화관을 나와서 그제야 눈물을 흘린 몇몇 관객은 아마도 그 이유를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울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Tom Hunter

Life and Death in Hackney


After The Party


Eve of The Party


The Way Home

The Vale of Rest

Woman Reading Possession Order

The Art of Squatting

A Woman Asleep

Death of Coltelli

Anchor and Hope 


Road Rage Thug


Holly Street Voids





Naked Death Plunge


Travellers


Shopkeepers off-license


Ghetto model detail

Gh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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