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흠모하는 테드 창 오빠야의 중편이 새로 번역돼서 재빨리 입수했다(출판사도 요즘 그 핫하다는 북스피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처음 몇십페이지는 정말 가슴이 둑흔둑흔대서 빨리 읽고 싶으나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깝고 앞의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어서(읽는 와중에도!) 뒤적뒤적대면서 아끼고 아껴 읽었음.
-영화제 기간 중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변화는 불가피하며, SF는 좋든 나쁘든 변화한 상태를 살피는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변화를 멈추고자 하는 노력은 항상 실패했다. 예를 들어 개인·국가 단위에서 체세포 복제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새것이 항상 좋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필수불가결한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옛것과 새것 사이에 무엇이 나은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경향신문 인터뷰 중)
테드 창은 여기서 SF란 장르의 특색으로 '시작과는 곳과는 다른 곳에서 결론이 맺어지는 것', 즉 '새로운 기술로 인해 세계는 변화하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꼽았다. 이는 판타지의 일반적 '패턴'과 다르다. 판타지에선 평화로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악의 세력'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이에 맞서 승리함으로서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즉 현상유지란 측면에서 "기존의 것이 좋았다"라는 보수적인 정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반면 SF의 패턴은 '익숙한 세상에 새 기술이 나와 세상은 변화하고 그 결과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그 두가지가 공존할 수도 있지만, 어쨌듯 과거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다"라는 진보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 즉 "SF는 변화의 문학"이라고 강조한다.
(http://blog.ohmynews.com/staright/160563)
테드 창 검색질하다가 나온 인터뷰 중에 이런 내용이 인상이 깊어서 더 자세하게 뭐 없나 해서 영어로 검색을 해보니 긴 인터뷰가 있었다.
I make science fiction my home because it’s been said that a genre is an ongoing conversation, one where novels and stories are responses to previous works. And in that sense, science fiction is a conversation that I continue to pay attention to, and that I want to participate in.
Shortly after teaching Clarion last summer I attended a science and technology conference in South Korea, where I’d been invited to speak about science fiction. One of the things I talked about was how my sense of science fiction differs from the popular conception of it. I think most people’s ideas of science fiction are formed by Hollywood movies, so they think most science fiction is a special effects-driven story revolving around a battle between good and evil, or something along those lines. While I like a story of good versus evil as much as the next guy, I don’t think of that as a science fiction story. You can tell a good-versus-evil story in any time period and in any setting. Setting it in the future and adding robots to it doesn’t make it a science fiction story.
I think science fiction is fundamentally a post-industrial revolution form of storytelling. Some literary critics have noted that the good-versus-evil story follows a pattern where the world starts out as a good place, evil intrudes, the heroes fight and eventually defeat evil, and the world goes back to being a good place. Those critics have said that this is fundamentally a conservative storyline because it’s about maintaining the status quo. This is a common story pattern in crime fiction, too—there’s some disruption to the order, but eventually order is restored.
Science fiction offers a different kind of story, a story where the world starts out as recognizable and familiar but is disrupted or changed by some new discovery or technology. At the end of the story, the world is changed permanently. The original condition is never restored. And so in this sense, this story pattern is progressive because its underlying message is not that you should maintain the status quo, but that change is inevitable. The consequences of this new discovery or technology—whether they’re positive or negative—are here to stay and we’ll have to deal with them.
This is a quintessentially science fiction storyline and it makes sense only in the wake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To a pre-industrial society, this kind of story would be incomprehensible, because no one had ever seen the world change in their lifetime. After the industrial revolution, we understand this story because we’ve all seen the world change. That’s what I think is at the heart of science fiction and what I usually tell people who aren’t familiar with it, whose ideas are mostly informed by Hollywood.
안 귀찮으면 번역을 해놓겠음. 혜리 언니 영화의 일기에 "휴가에 할 일에 OOO번역을 추가했다"는 문장을 보고는 또 역시 언니는 무용한 일을 참 잘해. 라며 감탄했사옵니다.
그러타 나의 올해 목표는 무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정작 책 내용에 대해선 그다지 코멘트할 것이 없고, 여러번 읽어도 충분히 좋을 책이다. 사실 장르문학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좋아하는 SF 작가라고는 테드 창과 배명훈 정도가 다이지만 벌써 홀라당 넘어가서는, '장르문학'이라는 꼬리표에 붙는 소위 순문학 애호가들의 의심스러운 눈길따윈 콧방귀로 물리칠 준비가 되었다! (읭?)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2~3년 전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이란 생각을 했다. 한창 삶삶삶 타령을 할 때 읽었으면 아주 좋아서 미쳤을 것 같다. (전혜린 에세이도 아마 비슷한 계열일 거라는 느낌이 든다. 엄마 고등학교 시절에 전혜린 열풍이 불어서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의 인기가 치솟았고 더불어 루이제 린저의 소설도 열독되었다고 한다. 그 시대의 문학 소녀들의 분위기가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이고 아주 그냥...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야자와 문제집에 찌들어 있었다는 게 정말 안타깝다. 책과 영화를 친구들과 공유하던 풍습(?)은 거의 열세살 무렵에 마무리가 되었다-_-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라오스 여행에서 체력이 떨어갈 때쯤 읽었다. 귀퉁이를 접어놨던 모든 페이지를 옮기긴 어렵고 일부만 발췌한다.
가장 임팩트 있었던 부분은 두군데인데, 극중의 니나가 쓴 유대인 수용소에서 하루 아침에 석방된 이들에 관한 짧은 소설(전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과 니나가 안락사에 대해 경멸을 숨기지 않고 상대의 논리를 논파하는 부분이다.
197p
B교수는 조심스런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인간 생명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형법은 사형을 허용하고 있고 국제법은 전쟁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법률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런 법률이 없다. 이 말은 강의 시간에는 조용히 받아들여졌으나 나중에 격렬한 토론을 유발했다. 학생 중 하나가 그런 법률은 이미 독일 민족이 나약한 휴머니즘의 견해에 반대해 강자의 지배를 옹호할 때부터 있었다고 주장했다. ... 이때 다른 여학생 하나가 한 무리의 짐승을 역병에서 구하려면 병든 짐승들은 죽여도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토론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
니나의 편이 되어서 싸운 두세명의 학생들은 완치될 수 없는 정신병자가 아직 인간인지 이미 인간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치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며, 오진의 가능성도 있고, 치료 방법이 개발될 수도 있으며, 여태까지 불치로 간주되었던 질병도 고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 니나가 정신병과 비정상을 구별할 수 없으며, 불치의 병자이면서도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반면에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고 말했다. 이에 누군가가 나서서 그렇다면 건강하지만 반사회적인 인간도 제거시켜야 한다, 국민은 이들과 정신병자를 희생시켜야 한다, 고 말했다. 이때 니나는 소리쳤다. 그럼 당신은 횔덜린도 죽였겠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니나는 완전히 자제력을 상실하여 복도까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질렀다. 생과 사를 결정하는 재판관은 누가 됩니까?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살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당신 같은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재판관이 되겠죠. 그리고 그들은 법이라는 미명하에 한번 죽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옳든 그르든 상관 않고 계속 죽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살인자들만 남겠지요. 나는 이에 반대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살인을 허가하고 그 살인에 불가피함과 선이라는 딱지까지 부여하는 국가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233p
니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자신도 말을 해놓고 놀랐다. 그럴 것이 전에는 이런 수상한 시대에는 자식이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는 마흔여덟이다.
극중 니나의 생애는 작가 루이제 린저의 생애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나치에 맞서 저항해 투옥되고 저서들이 금지되고... 뭐 그런 삶을 살았음. 전후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산문 작가이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함께 현대 여성계의 양대산맥이라는데 음 ㅎ_ㅎ
1911년 태어나 2002년 사망했고(무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니! 민음사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 놀라움.) 혹시나 우연히 옆에 책이 있던 제발트와 동시대 인물일까 해서 찾아봤더니 제발트는 1944~2001. 더 늦게 태어나 더 일찍 죽었구먼요.
생의 한가운데는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었고(퍼블릭 도메인은 작가 사후 50년(2013년부터 70년으로 연장)이니 아마 다들 7~80년대에 나온 해적판이지 싶다. 1950년에 쓰인 작품이니 무려 마흔 전에 썼다는 이야기이구먼요.
전체적으로 인상적이고 좋긴 했는데 음; 요즘 나를 뒤흔드는 류의 소설은 아니라서 별다른 코멘트를 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놈의 '삶타령'(꼭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고)은 이미 스스로 지겹도록 읽고 듣고 보고 늘어놓은 터라 이제 조금 나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게 꼭 순간순간의 '격정'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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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발간된 그녀의 전기는 그녀가 젊은 나치 지지자로 나치를 위해 영화 대본을 썼다고 밝혀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나는 되려 루이제 린저의 글로 미루어 그 당시에 나치의 선전에 '잠시' 넘어갔던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더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도 이런 과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10)
<당신과 원자탄>
(1945년 10월 <트리뷴>지에 게재. 히로시마 원폭 1945년 8월 6일 두달여 뒤에 발표한 글)
원자탄의 발명은 역사를 역전시키기는커녕 지난 10여년 동안 명백해 보였던 추세를 강화할 뿐이다.(210p, paraphrased)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 가장 강력한 무기가 싸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210p)
우리 앞에는 몇초만에 수백만명을 없애버릴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가공할 초강대국 두셋이 세계를 나눠가질 전망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전망은 전쟁이 점점 더 커지고 끔찍해짐에 따라 기계문명이 종말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식의 다소 성급한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만일 강대국들이 서로에겐 절대 원자탄을 쓰지 않기로 암묵적인 동의를(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한다면? 보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쓰거나 쓴다는 위협을 한다면? 그럴 경우 우리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권력이 더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피지배 민족들과 피억압 계급들의 미래는 더 암담해진다는 것뿐이다.(212p)
원자탄은 피착취계층과 민족의 저항능력을 전부 빼앗아버리는 동시에 그것을 보유한 자들을 군사적으로 대등하게 해줌으로써 그런과정을 완수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를 정복할 수 없기에 그들끼리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해나갈 것이며, 더디고 예측하기 힘든 인구통계학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균형이 어떻게 깨질지 알기 힘들다. (...) 우리는 전반적인 와해가 아니라 고대 노예제국처럼 끔찍하게 안정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게 비확산조약이 아니면 무엇이겠능가=_= NPT(Non-proliferation Treaty)는 이 글이 쓰인 지 20년 후인 1968년 서명되어 70년에 발효되었다. 95년 가입국은 190개국으로 증가했고 현재 핵을 가진 국가는 유엔 안보리 멤버와 동일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이다. NPT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는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남수단뿐이고 북한은 2003년 철회했다. 이런 거 보면 외교론에서 현실주의의 힘을 실감함. 웨스트윙 봐도 마찬가지고. 엄청난 성취라고 자랑스러워 했겠지만 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미약한, 그러나 현실적인 조치인가. 어찌되었건 핵 보유국에서 반핵(무기)운동의 논리를 성공적으로 전유해 이런 차별적 조약을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다른 분야에서 시민운동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기성 정치에 이용당할 수 있는지도 생각이 난다.
별 관계는 없지만 후쿠시마 이후로 독일이 탈원전 선언을 했었는데 (그외에 몇국가 더 있었나? 기억이 안 남.)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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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어딘가 '하루키 산문스러운' 에세이로 자기가 이상으로 그리는 펍을 묘사하는 <물속의 달>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매우매우 귀여운 글이었다. 이 에세이의 영향으로 영국에는 "물속의 달"이란 상호를 쓰는 펍이 많다는데 영국에 700여개 펍 체인을 거느린 Whetherspoon도 이 글에 착안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함. (1호점 이름이 '물속의 달') (이런 정보들은 이 책 역주에 깨알같이 적혀있는데 역주가 살짝 과도하게 친절한 경향은 있지만 대체로 훌륭한 정보들이다. 편집이 매우 잘된 책이라고 생각함.)
웨더스푼 1호점인 'The Moon Under Water"는 맨체스터에 위치해 있고 이렇게 생겼음.
아이고 영국의 펍이여- I never liked pubs. 뉴캐슬에 처음 갔을 때는 대체 이 인간들은 밥을 어디서 먹는 건지 대체 레스토랑이 보이질 않아서 답답했었다. 보통 펍에서 간단히 해결한단 걸 알고 얼마나 기함을 했던지! 그 기름지고 맛없는 펍 음식. 아. 펍의 문제가 아니라 영국 음식의 문제인가. 영국에서 내가 유일하게 '맛있다'고 느낀 집은 뉴캐슬 굴다리(?) 밑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는데, King Prawn Pasta가 매우매우 신선하고 맛있었다. 그러나 어째 다음번 찾아갔을 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새 주방장이 바뀐 겐가.
여튼 지나가면서 물속의 달이라는 펍을 보지 않았을까 했는데 구글맵에서 검색을 해보니 역시 멋없는 북부에는 없고 맨체스터에 한두개와 런던에 대여섯개가 몰려 있다. 그나저나 이름만 같으면 뭐 하나. 오웰 오빠는 요구 조건이 너무 많으셔서 이런 펍이 정말 있기는 힘들겠구랴.
<정치와 영어>라는 에세이는 귀찮아서 안 읽었지만 영문과에서 꼭 읽고 넘어가는 글이라고 해서 흥미가 도로 생겼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튼 이 책에서 가장 폼나는 글은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그런데 그게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문장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하며, 충실성의 문제가 새롭게 개입된다. 보다 투박한 유형의 어려움이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이 책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 따위가 가득한 긴 장章이 있다. 이와 같은 장은 1~2년 뒷면 일반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말하자면 책을 망칠 게 뻔한 부분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평론가는 그 부분에 대해 내게 훈계를 했다. "그런 걸 뭐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130907 그간의 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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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2
책모임을 가졌다.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었다. 좋은 에세이집이었다. 내가 모임에서 기대하는 바와 모임이 나아갈 방향이 자칫하면 어긋날 것 같고 구성원들이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우려가 됐다. 좋은 세미나(?) 모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더 열심히 조사를 해가야 겠지만 나만 그렇게 해서는 소용이 없을 테고, 한 사람이라도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임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이 모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매우 희망적이었는데 으어- (그래도 아직 포기할 단계는 전혀 아니고, 좀 열심히 해보려는 의지가 필요할 듯)
130823-130901
후딱 짐을 싸서 라오스로 갔다. 라오스, 특히 루앙프라방은 천국이었다. 흐엉엉.
후진 핸드폰 카메라지만 이 정도는 나온다규.
130901
라오스에서는 분명히 한국에 돌아가서 일상에 쏟아부을 에너지가 넘쳐났는데, 엄... 돌아오자마자 일요일은 떡실신. 그래도 다음 주에 방콕을 가야 할 정도는 아니므로 99% 취소할 듯. 1%의 돌발상황을 위해 아직 취소는 안 했지만... 일단 이사 갈 집부터 구해야...
130902
헝거 게임을 보았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황금시대 들으면서 오다가 급 발동해가지고. 캣니스 에버딘이란 이름이 Katniss Everdeen이라고 쓰일 줄은 상상도 못했시유. 오랜만에 신나는 할리우드 영화였다! 후속작도 기대됨.
포스터는 좀 별로임. 사실 포스터 때문에 안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제니퍼 로렌스는 윈터스 본에서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윈터스 본은 던디의 웬 대학 기숙사에서 봤지. 영국과 호주의 기숙사들이란 다 똑같이 생겨서 벽돌 위에 연한 병아리색을 칠해놓은 벽돌벽에 흰색이나 버건디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쓸데없이 무거운 문과 진한 남색 카페트가 있고, 헨리 청소기가 구석에 처박혀 있다. 나도 청소기를 산다면 헨리를 갖고 싶어!
안뇽 난 헨리야
헨리 미니어쳐
기승전헨리?
너는 내게 물었지 가장 두려운 게 뭐냐고
다시 들어도 명곡일세. 가사가 진짜 좋다.
코드는 매우 쉬운데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는 노래
특히 이 부분은 잊을 수가 없지
And once you asked me well what's my biggest fear That things would always remain so unclear That one day I'd wake up all alone With a big family and emptiness deep in my bones That I would be so blinded, turn a deaf ear And that my fake laugh would suddenly sound sincere
너는 물었지, 가장 두려운 게 뭐냐고
아무 것도 또렷하게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어느날 홀로 일어나보면
대가족과 뼛속까지 시린 공허함만이 남을 것이
눈이 멀고 귀를 막고
내 가짜 웃음이 갑자기 너무나 진실되게 들릴 것이
나머지 부분도 읽어보면 그냥 시임 시 ㅋㅋ
나는 번역을 하면 안 되겠다
이 발랄슬픔한 가사를 이렇게 중2돋게 만들다니 게다가 맘대로 의역해ㅋㅋㅋㅋ
이렇게 무서운 가사를 이렇게 발랄하게 부르다니 퍼스트 에이드 킷 짱짱맨
언니 너무 의외로 생겼네...
들을 때마다 귀에 박히는 가사가 다르다
히히 F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