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009 새로운 적성


새로운 적성을 발견했다: 인테리어. -_- 


어제는 더러운 싱크대 벽에 타일을 붙이고 오늘은 콘크리트 벽에 해머드릴로 구멍을 스물네개나 뚫고 목공소에 가서 선반 목재를 구입해왔다. (비록 어제는 싱크대 썩은 나무를 만지다가 부숴버렸지만...) 내일 회사 가서 자랑해야지. 콘크리트 벽에 드릴 박는 사람이라고 내가! 


집이 너무너무 좋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넓고 좋은 집이니 열심히 꾸며서 집순이가 되어야지. 공간분리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침실과 작업공간이 분리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삶의 질이 다르다니. 침대에 누우면 딱 자는 느낌이라서 좋다. 예전엔 노상 침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내가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분간이...(-_-) 


너무 좋아서 버리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 하지만 너무 금욕적인 것보단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을 더 잘 꾸려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소 과소비일지라도.




*


쇼스타코비치 왈츠 2


아니 쇼스타코비치가 이렇게 찌질찌질하게 생겼다니! 




131007 Just in time


프로젝터를 상설한 기념으로(?) 오랜만에 영화들을 틀어봤다.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비포 선셋을 틀었다가 요즘은 주 관심사가 홈 데코이기 때문에 셀린의 방을 유심히 살펴보고(컨셉을 바꾸기로 했다) 니나 시몬을 연속해서 들었다. 


그 유명한 대사 "baby, you're gonna miss that plane"를 하며 부르는 노래가 바로 Just in Time. 다른 커버들도 좋지만 니나 시몬이 부른 느낌과는 사뭇 달라서 깜짝. Julie Andrews가 나오는 저 영상은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하다. 줄리 앤드루스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으니 저 여자가 노래를 저렇게 청아하게(!) 부르는 사람이었나 새삼 놀랐다.








최금진 - 착한사람

팟캐스트 듣다가. 시가 너무 좋아서 받아적었다. (원문 시작 2012 겨울호 수록)

아 이 시인 멋있는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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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착한 사람


나는 착한 사람, 앞으로도 목적 없이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종착점 같은 것은 없다

도피중인 사람들은 나를 대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고

권위적인 사람들은 내가 의자로 보일 것이다

대화와 소통은 미개한 짓, 나를 도구로 사용한 흔적이 당신의 

손에 돌도끼처럼 들려져 있지 않은가

한때 시간을 주머니에 넣어서 다닌 적도 있었지만

누구를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 몰래 버리기 위해서였다

투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담배도 피지 않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흉보고, 욕하고, 비난하면서

변명과 복수들을 차곡차곡 지폐처럼 모아

배를 한 척 사고, 진화의 역방향 쪽으로 배를 몰고 가겠다

주말엔 텔레비전을 보고, 될수록 잠을 많이 자고

제발, 나를 내버려두라고, 그런 요구조차 안하고

이불 속에서, 늙은 쥐처럼 눈 오는 창밖을 멀뚱히 훔쳐보고

책도 한 줄 읽지 않고, 무식하게, 형편없게, 무기력하게 

학술회에서, 강연회에서, 술자리에, 몰래 빠져나온 사람처럼 

늙어 갈 것이다, 어떤 참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날 사랑한다면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도둑질도 하지 않을 것이, 카드 빚도 갚지 않을 것이다

미친놈, 샌님, 또라이, 비관주의자, 암사내, 집짐승, 퇴보, 퇴보

나는 당신들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른 체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나는 끝내 당신들의 살의를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



테드 창 인터뷰 번역

http://aalrmag.org/specfictioninterviewchiang/


여튼 연휴에 잠만 잔 기념으로 테드 창 인터뷰라도 하고 연휴를 내일로 마감해볼까 한다. 흐흑. 너무 길어서 전문을 다 하긴 무리고 재밌는 부분만 복붙 + 일부 번역. 


BH: SF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왜 SF 소설을 쓰는지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TC: 제가 SF소설을 쓰는 이유는 이 장르가 진행 중인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한 작품은 이전 작품에 대한 대답이지요. 제가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대화가 SF장르라고 할 수 있죠. (번역이 맘에 안 들어서;)

(위에서 언급한) 작년 여름 Clarion(UC 샌디에고에서 열리는 SF소설 워크샵-옮긴이 주)에서 수업을 한 후에 한국에서 열린 과학기술 컨퍼런스에 SF에 대해 강의를 하기 위해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컨퍼런스에서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SF라는 장르가 세간의 인식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것이었죠. 대다수 사람들의 SF에 대한 인식은 할리우드 영화에 의해 형성돼서, 보통은 SF가 특수효과 위주의, 선과 악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느 사람들만큼 선악 대결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SF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선악 구도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적/공간적 배경에서도 찾을 수 있죠. 배경이 미래이거나 로봇이 등장한다고 SF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SF가 산업혁명 이후의 스토리텔링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학평론가들은 선악 구도의 이야기의 도식을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로운 세계에 악의 세력들이 침입하고, 주인공들이 맞서 싸우고,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고 세계는 다시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구조라고요. 평론가들은 이것이 궁극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수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구도는 범죄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질서에 약간의 분열이 생기지만 결국 질서를 되찾죠. 

SF는 다른 구도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야기는 익숙한 세계가 새로운 발견이나 기술 때문에 변화를 겪는 것에서 시작하죠. 이야기가 끝날 쯤에 세계는 영구적으로 변화해버립니다. 원래의 상태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아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에 숨겨진 메시지는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변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결국 이런 이야기 구조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발견이나 기술의 결과들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우리는 그것을 대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런 것이 전형적인 SF의 줄거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죠.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이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살아생전에 세계가 변화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요. 산업혁명 이후에야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변화하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죠. 이게 제가 SF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고,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만 SF를 아는, SF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SF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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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중단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의 원문 전문은 여기(http://subterraneanpress.com/magazine/fall_2010/fiction_the_lifecycle_of_software_objects_by_ted_chiang)에서 볼 수 있다. 알고보니 Subterranean Magazine라는 잡지는 장르문학 계간지인 모양인데, 계간지에 수록된 소설들의 원문을 제한 없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고 있다. 장르문학에 주력해 1995년 시작한 이 회사는 콜렉터스 에디션 등을 만들어서 서브컬쳐계(?)에서는 꽤나 알려진 모양. 스티븐 킹 등 유명 작가 작품을 냈다고 메인에서 자랑하고 있다. -.- 이런 회사가 거의 20년간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보니 역시 덕 중의 덕은 양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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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서 나머지는 못허겄다-_-

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 봄에 읽던 책이라 좀 낡긴 했지만, 정리하는 데 의의를 두고. 서해문집에서 2010년 출간됐다. 역자는 차미례 선생.




저자 소개는 눈여겨 볼 만한 구석들이 있다. 저자 테렌스 데 프레(Terrence Des Pres)는 위키피디아에 무려 'Holocaust scholar'라고 소개되어 있다.  책날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1987년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아주 건조한 부고에는 사고사(accidental death)라고 쓰여 있다(여담이지만 부고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OOO is survived by ...'라는 표현은 참 애잔하고 귀엽다). 속단할 필요는 없지만 프리모 레비를 비롯한 많은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어찌 되었든 학술서인 터라 생각보다 크게 알려진 책은 아니다. 1976년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놀라운 점은 역자가 이 책을 출간연도인 76년를 포함해서 세번이나 번역한 셈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포함해 곰브리치, 테리 이글턴 등을 번역한 훌륭한 역자인 데다 50년대생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대에 여성으로 신문사 국장, 논설위원까지 한 것을 보고 후덜덜. 여튼 역자 서문도 굉장히 흥미롭고 신뢰가 간다.)

몇달 전에 이 책을 읽을 땐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홀로코스트 관련 책들을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었는데 또 바로바로 정리를 해두질 않으니... 직접인용된 문헌들의 목록은 책 뒤에 수록되어 있다.

71p
트레블링카의 집단 강제수용소는 실적이 좋은 날이면 하루에 1만 5000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처형되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살육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한 데다, 전쟁의 끝 무렵에는 SS(나치 독일의 친위대)도 이 같은 잔학상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시체를 매장했던 큰 구덩이들을 다시 파서 반쯤 썩은 시체들을 모조리 태워 없애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존더 코만도'라고 불리는 수백명의 죄수들을 동원해서 행해졌다. 

72p
<나의 동료들은 어디로?>(Where are my brothers?)에서 사라 베르코위츠(Sarah Berkowitz)는 조그만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밤, 바라크에서 자고 있던 죄수들 가운데 한 소녀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유도 모르게 몇만명이나 되는, 수용소 안에 있는 재소자 전원이 함께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88p
19세기 중엽 이래로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우월, 정신적인 깊이, 인간의 감성과 안식을 고도로 순화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생각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나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본다.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고통을 통한 구원, 키르케고르가 절망을 특히 강조한 점, 니체가 인간의 나락을 강조한 것,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억압받고 짓눌린 자들을 치켜세운 것 등이 그 원인이 아닐까?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처럼 다양하지만 사실 그 결과는 단순하다. 어떤 인간의 고통이 크며 클수록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돋보이며, 더욱더 진실해진다. 그러고 나서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황금 같은 가치를 갖게 될 때에, 그 개인의 상처와 아픔은 훨씬 더 견디기 쉬워지는 것이다. ...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고통에 대한 선망 같은 게 있다. 이것은 교육을 받을수록 더 크게 느끼는 것이며, 역사가 우리의 고통을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는 아깝고 속상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고통에다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선택받은 행복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생존자의 문학을 통해서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테마는, 고통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그처럼 광범위하고 거대한 고통은 전래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98-101p
살아남는다는 행위는 생존자 자신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가치를 지님에 틀림없다. 한라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체주의 정권이 자신의 모든 악행의 기록을 사라지게 할 망각의 심연을 만들기에 급급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나치가 화장, 묘지에서 파낸 시체 태우기, 서류소각, 폭파, 화염방사기나 인골분쇄기계를 총동원해서 1942년 6월부터 계속했던 광적인 증거 인멸 작업은 실패로 끝났다. '고요한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게 하는 일'은 허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망각의 심연이란 없다. 인간사에서 완벽한 것은 드물다. 더욱이 이 세상에는 망각을 가능하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서 진실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러한 한 사람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예컨대 1915년 터키에서 아르메니아인을 말살하려는 고의적인 정책으로 100만명이 도륙을 당했다. 도시마다 조직적인 학살이 이어졌고, 농촌 마을은 불탔고, 수많은 남녀와 어린이들은 사막으로 쫓겨나서 굶어 죽었다. 그런데 이 참혹한 사건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히틀러가 그의 참모들에게 유태인 대량학살의 구상을 제의했을 때, 세계의 양심을 무마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은 "결국 오늘에 와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가공할 만한 파괴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이 삶보다 더 강하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우리 시대의 힘의 논리인 것이다. 
... 
생존자들은 자기의 죄의식이든 타인들의 죄의식이든, 그것을 정죄하기 위해 증언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악에 대한 객관적 응징을 위해서 증언대에 선다. ...그 증언들이 기록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 이러한 책들은 인류의 영웅주의가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증거다. 

118p-
우리는 집단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의 모습이나 냄새를 쉽사리 간과한다. ... 결과적으로 수용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간의 큰 반발심과 혐오감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그런 사실들을 기억한다면, 나치의 냄새나는 책략이 그렇지 않아도 촉발되기 쉬운 수용자들 간의 반감을 조장하거나 서로의 혐오감을 키워 연대감을 말살시키는 데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 자신이 인간 이하라는 자각을 하도록 강요받은 것이다. 반면에 SS 대원들은 그들의 총과 당당한 위품 때문만이 아니라 수용자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오물로부터 말끔하게 격리된 세계에 서 있기 때문에 훨씬 우월한 인간으로 돋보이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수용자들은 일부러 고안된 오물의 진창길을 다녀야 했다. 깨끗한 도로는 SS대원들의 전용물이었다. 
왜 그토록 비참하게 수용자들을 학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왜 그런 동물 이하의 상태에까지 인간들을 몰아넣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정곡을 찌른 해답은 "SS대원들의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희생자들이 도저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천하고 더러운 몰골을 하고 있을수록, 학살자들은 인간을 대량 살육한다는 공포감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타 세레니 인용)

한나 아렌트는 1974년 뉴욕의 강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죽이기가 쉽고, 개보다는 쥐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 쉬우며, 벌레 가은 것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문제는 시선, 눈동자이다."

122p-
어떤 여자든 세수를 할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거나, 신발 끈 매는 것을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생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 바이스(Weiss)

몸을 씻는다는 것은 건강상의 이유로 씻는 것과는 별개의 형식적 의미의 행동이라도, 수용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임을 알았다. 이를 중단한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죽는 것이었다.

4시30분이면 커피-아무 영양가도 없이 고약한 냄새만 나는 엷게 우려낸 향료-가 배급되었다. 우리는 흔히 두어모금만 마시고 나머지로 세수를 하곤 했는데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보잘것없는 커피조차 안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씻기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덤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씻는 데 실패한 사람은 곧 죽는다. 이것은 철칙이었다. ...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는, 틀림없는 전조였다.

힘들어서 더이상은 못 옮기겠는데-_- 전체적으로는 3장 <배설물의 공격>과 5장 <죽음 속의 삶>이 가장 인상 깊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정리를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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