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27 Ben Allison Band Performing Green Al
- Ben Allison Band! 이런 공연이라면 당장 달려가서 보겠습니다. ㅇ_ㅇ
-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냥 담담히 공부하면 될 것 같다. 요즘은 그놈의 '깊은 슬픔' 빼고는 공부욕도 좀 생기고 해서 나쁘지 않다. 어젯밤에는 기타를 치면서 Living Life를 불렀다. 한밤중에 기타 치면서 노래 불러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다는 것이 혼자 사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인 것 같다.
- 포르노 이슈라는 책이 눈에 띄어서 집어왔는데 앞에만 봤지만 괜찮은 편이다. 도킨스와 밈 이론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내가 과학에 얼마나 무지한지 또 깨달았다.
- 잠 자는 것이 가장 좋지만서도 이렇게 삘 받는 날은 자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낮에 밤의 반만 되는 집중력이 있었어도 참 좋을 텐데. 학생 때도 해가 질 때까진 공부가 안 되더니. 직장을 다니지 않더라도 멋대로 일어나고 자는 것은 장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새벽의 이런 소중한 시간을 졸려서 버틸 수가 없어 놓쳐야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독서는 몇시에 가장 잘 되는 걸까?
- 조금 더 좋은 블로그 서비스로 옮기고 싶은 생각은 항상 하지만... 갤러리와 동영상 등을 모아서 '예쁘게' 보여주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아. 결정적으로 모바일 뷰가 안 이쁘다.
- 다음 주 휴가를 어떻게 활용할지 잘 생각해보자.
앤드류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레이철은 맨발로 그 다리의 널판들을 가로지르는 경주를 좋아했다. 널판은 60센티미터 정도 간격으로 고르게 놓여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는 쉬웠다. 발을 디디는 곳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밤에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그러면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발을 디뎌야 했다. 한마디로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과 타이밍. 미끄러졌다 하면,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 하면 발이 널판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강이뼈가 뚝 하고 부러질지도 몰랐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만약 재수가 없어서 발이 쑥 빠져버리는 날에는 10미터 아래 강물 속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리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는 물론 한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거나 비틀거려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렇지만 말했듯이, 정작 중요한 점은 믿음, 나무 널판이 내가 발을 디디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널판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Rachel liked to have barefooted races across the planks of the bridge. The planks were evenly spaced, about two feet apart from each other. With a full moon it was easy, you could see where you were stepping, but other nights it would be pitch black and you would have to do it blind. It came down to faith. That and timing. If you slipped once, if your timing was just slightly off, your foot would slide into an empty space and you might snap a shin bone, or even worse, if you were unfortunate and slipped through, you might fall thirty feet into the water. And of course we were young and confident and so we never once slipped, or fell, or even stumbled. The trick was always to get a rhythm in your head and to concentrate on it. But like I said, it mainly came down to faith, an almost blind trust that the wooden plank would be right there when you put your foot down. And it always was.
130722 한윤형, 박해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facebook.asp?article_num=50130712171049
"부모님 세대는 사회 내에서 자신의 계층이 상승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자체가 상승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사회는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단 사실에 의문을 품은 바도 없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삶이 나보다 더 나을 거란 것도 그들에겐 명약관화한 진실이었다. (…) 하지만 이 세대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느낌'은 그와는 정반대다. (…) 친구 하나는 그랬다. "내가 불행한 것도 문제지만, 아이를 이런 세상에 낳기는 싫다"고. 옳든 그르든 지금 세대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다." (133~134쪽)
한윤형 : 90년대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아파트와 대학생이 급격히 늘어나다가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는 거죠. (중략) 어쨌든 임금이 그래도 상승하고 집값도 안정적이었던 90년대가 진행되다가 IMF 사태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우리가 IMF 사태를 겪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 충격을 흡수했더라면 한국 사회의 여러 변동들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박해천 : 그건 불가능하죠. 돌이켜 놓고 보니 90년대는 아주 예외적인 시기였지 그 자체가 정상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심하게 말하면 한국 사회가 제게 안겨준 제일 큰 행운은 90년대에 20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할 정도로요. 또 다른 행운도 세대적인 건데, 과외 금지 시기에 10대를 보냈다는 거죠. 학교 마치면 놀 수 있었고 놀다보면 심심해서 소위 '뻘 생각'이라는 것도 할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자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껏 누릴 수 있었고, 부모님은 사교육에 거의 지출을 하지 않으실 수 있었지요.
72년생인 소설가 정이현 씨는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던 세대였다고 쓴 적이 있어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느낌으로 살았던 거죠. (웃음) 4년제 대학을 다닌다면 취업 걱정을 안 해도 되었고, 덕분에 세상이 만만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한국이 정말로 유럽 선진국 어딘가에 가 있다는 건데요….
한국 사회에서 '문제'라 하는 것들은 이 방주를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어요. 동시에 예전에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청년 세대들에게도 방주 탑승권이 주어졌지만, 2002년 이후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올라타지 못합니다. 대출을 받지 않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부모님으로부터 증여받는 것뿐이지요.
"오늘날의 20대 혹은 청년 세대 담론이 흥미로운 것은, 청년들을 규정해보려는 윗세대들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20대들의 철저한 무관심 혹은 소외 현상에 있다. 20대는 본인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다. 한편 윗세대들 역시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데 20대의 견해를 참고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견해를 참고해야 하는지를 정하지 못한다." (169쪽)
이렇게 놓고 보면, 청춘이란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낭만주의적 색채, 자유연애에 대한 판타지,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이란 해방감, 자아의 발견 같은 그 속성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이런 속성들은 지금은 청춘이 아니라 '중2병'이라 불리죠. '얘가 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구나'가 아니라 '얘 중2병 걸렸구나'가 되는 거죠. (웃음)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청춘'이란 호명 자체의 설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전 같으면 직장인이 되어서야 경험하기 시작했던 삶의 하중이 계속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면서 이제는 중학교나 초등학교 고학년을 다니면서부터 그 하중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청춘이라는 표현은 시대착오적인 언어유희, 실재하지는 않으나 마음속에만 남은 로망, '언젠가 가닿을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 속의 신기루가 되어버린 겁니다. 실제로 청춘을 누리지 못함으로써 이미 청춘을 누린 이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져 가고요.
한윤형 : 정치적인 결집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청년 세대의 정치적 의식은 과거와는 다르게 발생하는 측면이 있어요. 가령 '20대 개새끼론'처럼 대학생들에게 정치의식이 없다고 핀잔했던 경우를 보면, 80~90년대 학번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대학 시절이 가장 진보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 대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화된 대학에서 정치의식을 가질 만한 탈출 공간이 없다보니 대학생일 때 오히려 더 자본 논리에 입각해서 살다가, 대학을 벗어나 취업 준비나 입사를 하면서 자신이 '을'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박해천 : 여러 지표를 봤을 때,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독립해서 원룸이나 자취방에 살고 있는 분들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그 '방'에서 탈출해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사실상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지금 서울이나 수도권 주요 도시의 아파트 가격이라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상은 그렇습니다. 물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2005년 전후, 그 이후에 떠나신 분들 상당수는 지금 하우스 푸어일 겁니다.
더 큰 문제도 있어요. 여러분들 부모님의 상당수가 50대 이상인데, 50대 자가 소유 비율이 60퍼센트 약간 넘습니다. 이 베이비붐 세대가 노후 생활을 영위해가는 데 필요한 최소 자산의 규모는 가구당 3억 6000만 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그 세대 전체의 24퍼센트밖에 안 돼요. 그리고 지금 가계부채가 1000조 원이라고 이야기되는데, 그 가운데 50대 이상이 진 빚이 그 절반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50대 이상 분들의 대부분이 제도가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사이에 경제 활동이 끝납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 부모님 세대의 상황입니다.
월세방에 거주하는 여러분들 중 일부는 여전히 '조금 더 기다리면 부동산 폭락이 올 거고, 그때 집을 구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폭락한 집의 집주인이 확률적으로 바로 여러분의 부모님, 친구의 부모님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베이비붐 세대의 자가 소유 비율(60퍼센트)과 가계부채 규모(400조 이상)가 이렇게 맞물려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경제 위기가 닥치면 가계대출이 몰려 있는 자가 소유자들에게 첫 번째로 피해가 가고, 그러면 갖고 있던 집들이 헐값으로 나오는 겁니다.
지난해 대선과 맞물려 반값 등록금이 이슈가 되었을 때 제 친구가 '이제 386 세대 자녀들이 대학 갈 때 되니까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구나'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의 부모인 50년대생들은 자녀의 대학 등록금이 마구 오를 때 별 불만 없이 그걸 지불했어요. 99년부터 2007년쯤까지 아파트 값이 올랐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고 경제 성장률도 2~3퍼센트 대에 정체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체제, 이전의 기회, 이전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고요. 그리고 이 모든 모순들이 가장 강렬하게 맞물려 있는 시점이 바로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여러분들이 3,40대의 나이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지요.
130722 제임스 설터, 던컨 한나, 에드워드 호퍼
나가기 전까지 약간 시간이 남으니 일기를 좀 써보기로 한다.
어제의 나를 힘들게 한 문단. 띠지의 위력을 알았다?
알았다고 설터 읽으면 되잖냐고! 실은 제임스 설터는 조금 무서워서 안 읽고 있었다. 아마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부드러운 몰락'에 관한 이야기쯤이라고 말한다면 제임스 설터는 그냥 몰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모든 초월적인 버팀목들과 자발적으로 단절한 우리 근대인들이 치르는 대가는 이것이다.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인생 그 자체와 싸우며 보낸다. 근대 이후의 위대한 장편소설들이 대체로 ‘시간과 의미’라는 대립 구도 위에 구축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명한 악과 싸우는 로망스적 영웅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와 대결하는 신경증적 영웅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성공이 아니라 실패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의미란 무의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는 것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제임스 설터는 이 모든 것을 거의 무정할 정도로 정확하게 해낸다. ‘정확하다’라는 평가는 우리가 소설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설터가 어떤 감정을 묘사하면 그것에서 불명확한 것은 별로 남지 않는데, 그럴 때 그는 마치 다른 작가들이 같은 것에 대해 달리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悲感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신형철(문학평론가)
표지화는 Duncan Hannah
http://www.modernisminc.com/artists/Duncan_HANNAH/thumbnails/
The Honey Trap
The Isle of Islay
The Czech Spy
이거 참 멋있는 언니군.
The Parisian Spy
반면에 파리 스파이 언니는 별론걸?
http://www.modernisminc.com/artists/Duncan_HANNAH/?image=The_Parisian_Spy
맘에 안 들어서 그림은 뺐다.
에드워드 호퍼 같은 느낌이 난다.
아래는 에드워드 호퍼.
분명히 김혜리 기자 글에서 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음. 어디서 본 거지. 인상적인 글이 딸린 책이었던 것 같은데.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받은 약간의 충격. 이 그림은 뭐지? 아무것도 없는 이 평범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 적막감과 외로움.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나 외로운 그림들이다. 여기에 현대인이고, 단절이고, 소통이고 그런 수식어를 붙이기도 싫은 그런 단호한 외로움.
뻔한 구도와 채색, 관습적인 인물들과 새로울 것 없는 아이디어로 이루어진 그림 같은데, 결과물은 여전히 날카롭다. 너무나도 미국적이어서-그것이 날카로운 묘사이건 아니건 간에- 보자마자 불편했고 싫었지만 가끔 이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었다.
으. 이런 그림 좋아하는 사람 되고 싶지 않았다.
Nighthawks
Office Night
Chair Car
130723 기린과 드롭박스
*
드롭박스에 생각보다 사진이 많아서 놀랐다. 일부러 과거의 사진을 찾아본다든가 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으음. 이것은 이번 겨울 사진입니다.
좋은 사진이구나. 으음.
나는 연인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볼 때 내 얼굴에 먼저 시선을 돌리는 유형의 인간이다. 드롭박스 사진을 보면서는, 나의 행복하고 구김살 없는 얼굴을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과도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으음. 중증이야.
*
써놓고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던 잡소리.
-
기분이 안 좋을 땐 기린을 검색해보곤 한다. 예를 들어 오늘 같은 날은 구글에 'giraffes'를 치고 멍하니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다 구글에 'can you ride a giraffe'를 검색해보고 이것이 나만의 페티쉬가 아님을 확인한다. 참고로 can you ride a 까지 쳤을 때 자동완성 1위는 zebra. 얼룩'말'이라서 사람들이 궁금해한 건가? 그보다 대체 왜 얼룩말 따위를 타고 싶은 걸까.
여튼 고화질 기린 사진들을 감상하면서 이 우아하고 사랑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동물에게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구석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현듯 내가 이 동물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검색을 시작했다.
"기린의 다리는 1.8미터로 웬만한 성인보다 크다. 다리가 기니 최고 시속 56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다. 기린은 혀조차 길다. 53센티미터에 달하는 이 혓바닥은 나무에서 잎사귀를 훑어낼 때 아주 적합하다."
구글에 giraffe tongue을 검색했다. 기린에게 사랑하지 못할 구석이 없다는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저 검은색 혓바닥은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그 혓바닥으로 나를 핥지만 말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