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11 그 결과 위가 터져 죽고 말았다(인체재활용 中).
'인간의 위가 터지지 않고 얼마나 많은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가?' 하는 간단해 보이는 연구조차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1891년 케이 아베르크라는 호기심 많은 독일 의사가 그보다 6년 전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연구를 재현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따로 떼어낸 인간의 위를 터질 때까지 채웠는데, 케이 아베르크는 위를 주인의 몸속에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는 이쪽이 현실적으로 배불리 먹는 식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잔치에 몸통이 없는 위만 홀로 참석하는 경우는 정말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실제와 더 가깝도록 시체들을 앉혀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그가 생체역학적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따진 것은 결과와 무관한 것으로 증명됐다. 1979년 <미국 외과 저널>에 실린 글에 따르면 두 경우 모두 4,000cc에서 위가 터졌다고 한다.*
*각주: 기네스 북 세계 먹기 부분을 즐겨 읽는 애독자들은 짐작이 가겠지만 이 기록은 여러 번 깨졌다. (중략) 최대 기록 보유자는 런던의 패션모델이었던 23세 아가씨인 것 같다. <랜싯>지는 1985년 4월호에서 이 아가씨의 식단을 다뤘다. 결국 최후의 만찬이 됐지만, 이 아가씨는 앉은 자리에서 간 450그램, 콩팥 900그램, 스테이크 230그램, 치즈 450그램, 달걀 두 개, 큼지막하게 썬 빵 두 조각, 콜리플라워 한 개, 복숭아 열 개, 배 네 개, 사과 두 개, 바나나 네 개, 자두와 당근, 포도 각 900그램, 우유 두 잔 등 모두 8.6킬로그램의 음식을 해치웠다. 그 결과 위가 터져 죽고 말았다.
(인체재활용, 123면)
121211 무용한 거짓말, 범죄의 후유증.
오랜만에 일기.
크리스티가 왔다갔다. 왔다간게 참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애정도 회복과 정신 차리기에 도움이 됐다. 여기서 내 인생이 끝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해줘서. 얘랑 함께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여나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있으리란 믿음은 일단 접어두자. 함께 하기 위해서 가야하는 길이 멀구나. 하지만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각자 차를 몰고 미대륙을 횡단해 텍사스-왜 하필 텍사스야!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고-에서 만나는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하다. 마치 다른 유니버스의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거나 불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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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거짓말을 가끔 한다. '언젠가 텀블러가 가방 안에서 샌 적이 있어요. 완전 악몽이었죠' 같은 류의 거짓말을 하곤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런 말을 내뱉곤 한다. 주로 친근감은 있으나 아직 친하진 않은 사람에게. 내가 말을 하면서도 난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조차 헷갈린다. 결국 정말 있었던 일로 믿어버리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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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갈 것 같다. 말하자면 '묻지마 폭행'을 당한 셈인데, 그 와중에도 희극성을 발견한 내가 더 우습다. 맞으면서도 내가 왜 맞고 있는지 이해하려 애썼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자동차 하이라이트에 도망간 그놈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허우적허우적 경비 아저씨를 찾을 때, 그리고 주변엔 아무도 없고 더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집으로 걸어갈 때, 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바라본 나는 눈밭에 뒹군 탓에 눈사람처럼 온몸에 눈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기 전까진 나에게 비극이 일어난 것이 아니므로 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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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휴일의 춘천일기를 읽고 갑자기 어딘가 가고 싶어졌다. 아무도 모르는 도시의 촌스러운 모텔에서 일어나고 싶다. 아마 실내는 어두침침하고 꿉꿉할테고, 누가 봐도 모텔용인 꼬질꼬질한 가구에 비해 최신식인 대형 벽걸이 TV를 보며 새하얀 시트--깨끗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긴 머리카락 한올이 베개 밑에 남아있을테다--에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노래도 듣지 않고 아무 글도 읽지 않고 아무 소통도 하지 않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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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황금연예관이란 이름으로 세운 영화관으로 시작했다. 1946년 신축 개관하면서 ‘국도극장’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1999년 건물을 허물고 호텔을 세우기 위해 폐관하였다.
지금 국도호텔이 있다고... 이 이쁜 걸. 리모델링해서 영화관으로 썼으면 간지 쩔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