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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150101
- 2014.12.24 Closer(2004)
- 2014.12.19 141219 요즘 이상하게 2
- 2014.11.18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
- 2014.11.14 141114 일의 슬픔과 기쁨
- 2014.11.10 141110 김훈의 한담 1
- 2014.09.11 카메라 정리 1
- 2014.08.19 140819 컬러링 북
- 2014.07.26 140726 Mercedes Sosa
- 2014.07.24 140723 일기 1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 2014년의 마지막 날과, 2015년의 첫날을 장례식장에서 보내고 있다. 과히 슬프지만은 않은 이곳에서 몸둘 바를 모르며 덕담 없는 새해를.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을 못 채우고 세상을 뜨셨다. 좋은 기억은커녕 곤란했던 기억뿐인 분이라 나는 무감하지만, 어느새 부모를 모두 보낸 엄마의 얼굴이 한층 늙어 보여 마음이 아프다.
손님 없는 정초의 한산한 장례식장에서 대기실과 빈소와 식당을 오갔다. 새해 첫 책은 <눈먼 자들의 국가>. 집에서 검은 옷과 함께 책을 서너권 챙겼지만 장례식장에서 읽을 만한 책은 이것뿐이었다. 사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은 곳곳에 산재하고, 우리를 구조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한 목소리로 말하는 글들을 읽다보니 2015년에는 그저 조금 더 안전한 나라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이제는 "부자 되세요"도 "행복하세요"도 아닌 "안전하세요" 즉 각자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지난주에 의식도 없던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후로 죽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맴돈다. 포기를 모르는 현대의학의 끝없는 연명치료의 공허함.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목숨>은 한 호스피스를 배경으로 한다. 산고의 고통이 7이라면 호스피스 환자의 통증은 9라고 한다. 이 끔찍한 통증 속에서 호스피스의 환자들은 얼만큼 명료한 정신으로 견딜 것인지, 즉 진통제의 투여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금 더 고통스럽더라도 또렷한 정신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수면 아래 잠기더라도 고통 없이 편안하게 마지막 시간들을 보낼 것인지. 그리고 환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각자가 삶을 살아온 방식과 놀랍게도 비슷하다고 한다.
팟캐스트에서 <목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엄마와 같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었다. 간병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핵가족의 병수발이 가져다주는 죄책감과 고됨. 외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그런 선택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기에 그런 제안을 하지는 못했다.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다. 호스피스에서 가족과 안정된 시간을 보내다가도 마지막으로 한번만 치료를 시도해보고 싶다며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것은 가족의 몫보다는 본인의 선택이어야 할 테니까. 스위스의 '조력 자살'에 대한 기사를 보며 생각한다. 앞으로는 이 나라에서도 삶의 방식의 반의 반만이라도 죽음의 방식이 다양해지길.
P.S. 이 쓰잘데없는 글을 스마트폰으로 끄적인 후에 한 대형병원에서 현직 외과의사로 있는 아버지의 친구분과 이야기를 나눴다(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와 친구분이 나누는 대화를 옆에 앉아 들었다). 실제로 할아버지의 병세가 나빠져 완화병동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병동이 턱없이 부족했다(할아버지 댁 근처에는 단 하나의 병동이 완화병동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침상은 열두개였다고 한다). 보호자나 환자 자신이 어느 단계에서 치료를 중단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병의 개선을 위한 치료가 연명치료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의사의 적절한 조언과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생각해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말...
141219 요즘 이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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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노트로 모든 자료를 옮겨보려 했으나, 쉽지가 않다. 줄간격 조정이 안 되는 게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다. 동영상 임베딩도 잘 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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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모 번역가의 영향으로 [겨울 나그네]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디히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의 버전을 추천받아서 듣고 있는데,
"하지만 누가 뭐래도 디스카우 예술세계의 정수는 슈베르트의 가곡이었다. 수도 없이 부르고 녹음한「겨울 나그네(원제는 ‘겨울 여행’)」「백조의 노래」「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를 비롯한 슈베르트의 노래들은 지금까지 리트 해석의 전범으로 남아있다. 외르크 데무스, 제랄드 무어처럼 반주의 묘미를 살릴 줄 아는 피아니스트와 함께 한 녹음은 감정을 안으로 삭이는 듯한 디스카우의 목소리와 정감 넘치는 피아노 반주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 음반으로 꼽힌다. 이를 통해 연주자와 특정 작곡자의 작풍이 이렇게 잘 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두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디스카우는 참 행복했던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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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구자범 칼럼이 끝났다. 감질난다. 흐규.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그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잘하는 단원의 수준이 아니라 가장 못하는 단원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 오케스트라 수준의 ‘책임’은 가장 못하는 주자에게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지휘자에게 있다.
절대음감이란 한마디로, 음을 들려주며 이름을 세뇌하면 나중에도 그 음을 들을 때마다 저절로 그 이름이 떠오르게 되는 병적인 잠재기억력이다.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실험한 바로는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음악을 들을 때 그 뇌를 관찰해보니, 일반인처럼 우뇌의 감성 영역만 활성화되는 게 아니라 좌뇌의 언어 영역이 동시에 활성화된다고 한다. (...)
독일의 지휘과에서는 실수로 ‘틀린’ 소리가 났을 때 곧바로 그 단원을 쳐다보지 않는 훈련을 한다. 그 단원은 이미 틀린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뿐더러, 쳐다보면 당황해서 연주하기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리면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즉각적인 반응을 하게 마련이라서, 이것을 무디게 만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수동 기어 자동차로 예를 든다면, 템포를 ‘분당 똑딱수’로 표시하는 메트로놈은 속도(㎞/h) 계기판이 아니라 분당 회전수(rpm) 계기판인 셈이다. 위 악보는 분당 회전수 3000에서 기어를 4단(1박당 음표 4개)으로 놓고 가다가, 분당 회전수는 4000으로 올리고 기어는 갑자기 2단(1박당 음표 2개)으로 내려서 자동차 속도가 느려진 경우와 비슷하다. 이렇듯 템포와 귀에 들리는 음악의 빠르기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
인류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인문학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딱 이 말만 빼놓고’라는 변증법을 알게 되었듯이, 자연과학에서는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다. 빛의 속도만 빼놓고’라는 상대성 이론을 알게 되었다. (...)
템포라는 음악적 시간은 그 곡의 형식과 내용, 분위기 등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메트로놈에 있는 템포를 나타내는 용어 중 실제로 빠르기를 나타내는 말은 ‘빠르게’라는 뜻의 ‘프레스토’(presto)와 ‘느리게’라는 뜻의 ‘아다지오’(adagio) 단 둘밖에 없다. 나머지 말들은 모두 일반 형용사나 부사이기에 메트로놈에 적힌 순서나 숫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어처럼 ‘그라베’(grave)는 ‘무겁게’라는 뜻이고, ‘large’와 관련된 ‘라르고’(largo)는 ‘넓게’라는 뜻이며, ‘long’과 관련된 ‘렌토’(lento)는 원래 ‘끈적끈적 늘어지고 처지게’라는 뜻이다. 마치 우리말의 ‘느리다’가 분명 ‘늘이다’와 큰 상관관계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또 ‘알레그로’(allegro)는 ‘발랄하게’라는 뜻이고, ‘비바체’(vivace)는 ‘생기있게’ 정도의 뜻이다. 물론 발랄한 말과 생기있는 말 중 어떤 말이 경마에서 더 빠를지 알 방법은 없다.
음의 ‘높이’가 높이가 아니라면 음향학적으론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음향학자들은, 오선보의 높이에 세뇌되지 않은 자연인이 느끼는 음의 특성을 표현한다면, ‘날카롭다’와 ‘무디다’라는 말이 가장 걸맞다고 한다. 음의 높고 낮음을 표시하는 기호인 ‘#’(sharp)과 ‘♭’(flat)의 이름이 음향학적으로는 가장 정확한 형용사라는 것이다. 즉 음에는 높이가 없고 상대적으로 날카로운 음과 무딘 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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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범 칼럼을 몰아서 읽다가, 평균율 얘기를 듣고 생각나서 오랜만에 손열음 중앙선데이 칼럼을 다시 찾아봤다.
나는 440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A 440㎐. 어렸을 적부터 내가 내 목소리로 ‘가온 도’ 음을 낼 때의 그 느낌이 440㎐로 조율한 가온 도 음과 가까웠다. 그 느낌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도’에 해당하는 음의 주파를 세로로 늘린 직사각형이라 가정하고 그걸 세 칸으로 나누었을 때 경계선 두 줄 중 아래에서 첫 번째 경계선 정도에 해당하는 음이다. 그것이 맞게 느껴진 이유는, 그것이 내 시대의 ‘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음감이 모태로부터 나는 것이라면 엄마가 나를 배 속에 가지고 있던 시절이, 절대음감이 훈련을 거쳐 확립되는 것이라면 80년대와 90년대 사이 언젠가가 바로 ‘내 시대’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음정’만 한 시대정신이 없다. 누가 그러자고 정하는 것도 아닌데, 쉼 없이 변하면서도 마냥 낮아지거나 높아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1640년 작 Vienna Franciscan Organ은 지금보다도 훨씬 높은 A 457.6㎐였다는데 50여 년 후 1699년 파리 오페라에서는 현격히 낮아진 404㎐가 표준으로 쓰였다. 백 년이 지난 모차르트 시대에는 421㎐를 사용했고 1812년에는 현재와 비슷한 440㎐가 잠시 표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1836년 플레이엘에서 내놓은 피아노는 446㎐까지 올라갔고 1880년 에라르 피아노는 455.3㎐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이상한 건 같은 해에, 현재 최고급 피아노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스타인웨이사가 436㎐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1925년 미국에서 440㎐를 받아들였고 1939년에는 세계적으로 채택되었다. 음정이 시대를 모방한 건지, 시대를 고양한 건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궁금해서 http://www.audionotch.com/app/tune/ 여기에 들어가서 440Hz와 442Hz를 비교해봤다.
그리고 순정률/평균율 비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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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밀회]에서 언급돼서 유명해진 손열음의 스페인광시곡 영상도 다시 듣고.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 2014)
p.10
왜 선택 앞에서 사람들은 그토록 무력해지는 것일까? 문제는 단순히 선진국 소비자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물품이 지나치게 많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오늘날 만연한 선택 이데올로기가 점점 소비자들의 불안감과 부족감(feeling of adequacy)를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p. 12
고도로 개인화된 우리 사회는 수백년 전부터 자본주의 발전의 초석으로 존재해왔던 '자수성가형 남성/인간self-made man'(뿐만 아니라 자수성가형 여성self-made woman)이라는 관념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
p. 13
선택 이데올로기의 역설은,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할지라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잘못이라고 믿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불안할 때 우리는 해야 할 것을 일러주는 권위자에게 너무 빨리 선택권을 넘겨버리고 그와 동일시한다. ... 하지만 우리는 선택 이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고, 선택과 더불어 오는 상실들을 피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피하고 싶다 하더라도 끝없이 연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명언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인생을 선택할까 궁리하느라 실제 살아가는 일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When making a choice in life, do not forget to live.").
p.19
후기 산업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추구하는 향락에는 제한이 없는 것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 후기 산업자본주의가 선택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영속화한다. (p. 26)
p. 42
오늘날에는 '자수성가'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심지어 어느정도 성공해 부를 획득하는 것조차 흔하고 당연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과제는 자기창조다. 포스트모던한 전문직들에게는 삶 그 자체가 일종의 예술 창작 활동 혹은 도전적인 기업 경영, 즉 계속해서 개량하고, 개정하고, 개선해야 할 것이며, 성공은 그것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p. 68
철학자들은 불안과 선택의 연관성을 오랫동안 주목해왔다.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은 자유로부터—즉, 가능성의 가능성을 직면해야 할 때— 나온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심연 앞에 선 개인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이 심연으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심연에 투신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p. 83~85
제이크 핼펀Jake Helpern은 Fame Jukies: The Hidden Truth behind America’s Favourite Addiction에서 유명인들의 개인 비서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발달시키게 되는지를 살펴본다. … 초반에 이들은 자신의 유명한 고용주와 동거동락하다시피 하며 점차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 유명인의 비서에게 요구되는 것은 광신적 종교 집단의 일원에게 요구되는 것과 유사하다. 핼펀은 이렇게 지적한다. ‘유명인의 비서와 광신적 종교 집단의 일원은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되며—위대한 이들을 보좌하면서 권력에 너무 가까워진 그들은 권력을 거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 이는 중독적이다.’ … 대중잡지 <US 위클리>는 유명인을 친근하고 이웃 같은 현실의 사람으로 나타내고자 애쓴다. … 이 잡지는 스타 이름의 약칭(젠Jennifer Aniston)을 사용해 그녀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유명인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 이런 이유로 유명인 되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선택지가 된다.
유명인과 동일시하려는 욕망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로버트 팔러Robert Pfaller가 명명한 ‘상호 수동성’interpassivity 개념을 도입해 보면 좀 더 복합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상호 수동성은 개인과 그 개인을 대신해 무언가를 경험해주는 대리인proxy 사이에서 일어난다. 가령 세르비아에서는 상을 치르는 사람들이 대신 애도해줄 여성들을 고용해 장례식장에서 곡을 하게 한다. 불교도에게는 자신을 대신해 기도해주는 마니차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결코 보지 않을 영화를 녹화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녹화기가 그들을 대신해 영화를 봐주기 때문이다.
p. 87~88
… 우리는 건강조차도 매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선진국에서 의료 서비스가 운용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왔다. 현재 의료 서비스에서는 선택과 자비 지배라는 관념을 예찬한다. 의사는 더는 권위자를 자처하며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법을 권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저 환자에게 선택지들을 고지하고 환자가 결정하도록 하거나 동의(또는 거부)를 표하게 하는 경우가 흔하다. …
현재 우리는 DIY 윤리를 몸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기 몸에 대한 책임과 통제를 스스로 떠맡으려 할수록 질병이나 허약함, 병원 치료와 같은 문제들은 점점 더 괴로운 일이 된다. 건강 문제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잘못이 되고 있다. … 우리는 심지어 ‘스트레스를 관리’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병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다른 부분—자기치유self-healing—에 실패했다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기 치유 이데올로기가 많은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공공 의료 서비스를 민영화하기 시작한 시기에 급격히 번성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 105
뒤푸르는 계몽주의 시대 초반에 개인이 자신의 준거를 바로 자신에게서 찾게 되었다고 본다. 바로 이때부터 주체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데 더는 외부의 존재—신, 나라, 혈통—를 참조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 고유의 기원이 되었다. … 뒤푸르는 탈근대 사회에는 더는 상징적 대타자, 즉 주체가 요구를 표명하고 문제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권위’가 되는 불완전한 실체는 없다고 결론 짓는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장이 대타자가 된다. …
141114 일의 슬픔과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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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하자마자 어제 나간 광고 컨펌 과정이 잘못돼 한바탕 난리가 났다.
완전히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도 말 한마디 덜했다가 일조했네.
아침부터 폭풍을 겪으니 정신이 너덜너덜하다.
출근하면 아침 10시까진 아무도 말 안 걸었으면 좋겠다.
직장인 인권법 제정!
폭탄할인하는 책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 몇달 전에 편집한 책을 찾아봤는데
알라딘에 이런 구매자 리뷰가 올라와 있었다.
"정말 좋은 책이다. 폭넓은 시각, 예리한 분석, 간결한 문장, 풍부한 정보로 (...) 핵심을 쉽게 이해하는데 더 없이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다. (후략)"
뿌듯하다. "간결한 문장"이란 말을 듣다니.
사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진 않지만, 고생하면서 다듬은 보람이 있다.
그리고 어쨌든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니 일한 보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몇주 전에 나온 책은 작가가 보도자료를 찾아 읽고 (빈말이겠지만) 핵심을 잘 이해해준 것 같아서 정말 고맙다. 라고 말해서 또 마음이 찡했다.
이런 걸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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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같은 폭풍과 매일 저지르는 잔잔한 실수들을 제외하고는,
올해는 낼 책도 없고, 큰 책 하나 끝난 이후로 드디어 여유가 생겼다.
잠시 멈추고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게 고맙다.
답**도 이젠 완전히 적응돼서,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러려니 한다. (좋은 건가?)
어차피 이 팀에서 일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여.
처음에 답**할 때 생각하면 정말 아득하다.
그때는 개인적으로 안 좋은 시기와 겹쳐서 정말 힘들었다.
매일 울고 팅팅 부은 얼굴로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파주에서 야근을 했지.
그때 찍은 셀카를 보면 거의 선풍기 아줌마 수준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도 걱정했는데 잘 적응해 일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
여름이 된 이후로 줄곧 더치커피와 캡슐커피로 연명하다가
이번 주부터는 여유(와 원두)가 생겨 아침에 핸드드립을 한다.
이제는 겨울이고, 주말에는 원두를 사야겠다.
141110 김훈의 한담
김훈의 한담(閑談)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366&aid=0000226568&sid1=001
나는, 가령 나의 무질서와 계통 없음을 말하는데, 누군가 인간의 신념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신념을 가진 자의 편이 아니고 의심을 가진 자의 편인 것 같다. 신념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내가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의심을 가진 자들 쪽에 더 많은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허무주의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이념이나 정치 노선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아마 그것이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을 보면 주전파와 주화파의 싸움이 나오는데 나는 아무 편도 아닌 것이다. 그 어느 쪽도 건전한 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에게 삶 이상으로 중요한 게 없다고 본다. 살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허무주의가 나의 글에 물론 있고, 세상의 허무와 싸우는 인간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허무주의냐 낙관주의냐 재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아니다. 일반 사람보다는 많이 읽는 사람이다. 온갖 책을 다 읽는다. 문학, 철학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자연과학서도 본다.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도 읽는다. 소방관 자격시험 문제도 읽는다. 여성 화장은 어떻게 하나, 그런 책도 읽는다. 다만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추호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의 바탕 위에다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거꾸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나 신념의 바탕 위에 사실을 세우려고 하면 다 무너져 버린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고 구체성이다.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체제나 지향성 그런 것은 나에게는 덜 중요하다. 어떤 가치 체계라도 삶의 구체성 위에 건설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자신 주변의 삶을 똑바로 관찰하지 않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 문사 14년 여름호. 하시라에 오타가 났다!
라스 폰 트리에는 정말 세상의 ‘샐리그먼들’을 확 쏴버리고 싶은 것이 아닐까? 아니, 적어도 쏴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이 <님포매니악>을 완성한 가장 큰 동력이 아니었을까? 이런 상상을 부추긴 꼬투리는, 조가 불감증을 극복하기 위해 말이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출신 남성을 일부러 섭외해 섹스하는 대목이었다. 회고 도중 ‘니그로’라는 비하 용어를 조가 입에 올리자 샐리그먼은 정색하고 그럼 못 쓴다고 제지하는데 조는 마치 이 비판을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된 반론을 펼친다. 그녀는, 하나의 단어가 사용 금지될 때마다 세계는 생기를 잃어간다는 신념을 피력하는 한편 나쁜 내용의 이야기를 좋은 포장으로 하면 떠받들고 악의 없는 이야기를 나쁘게 하면 핍박하는 세태를 꼬집는다.
http://www.cine21.com/news/view/group/M406/mag_id/77605
Max Ernst, 33 Little Girls Chasing Butterflies
140819 컬러링 북
140726 Mercedes Sosa
Sólo le pido a Dios
Que el dolor no me sea indiferente
Que la reseca muerte no me encuentre
Vacía y sola sin haber hecho lo suficiente
Sólo le pido a Dios
Que lo injusto no me sea indiferente
Que no me abofeteen la otra mejilla
Después que una garra me arañó esta suerte
Sólo le pido a Dios
Que la guerra no me sea indiferente
Es un monstruo grande y pisa fuerte
Toda la pobre inocencia de la gente
Es un monstruo grande y pisa fuerte
Toda la pobre inocencia de la gente
Sólo le pido a Dios
Que el engaño no me sea indiferente
Si un traidor puede más que unos cuantos
Que esos cuantos no lo olviden fácilmente
Sólo le pido a Dios
Que el futuro no me sea indiferente
Desahuciado está el que tiene que marchar
A vivir una cultura diferente
Sólo le pido a Dios
Que la guerra no me sea indiferente
Es un monstruo grande y pisa fuerte
Toda la pobre inocencia de la gente
Es un monstruo grande y pisa fuerte
Toda la pobre inocencia de la gente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dos luceros que cuando los abro
Perfecto distingo lo negro del blanco
Y en el alto cielo su fondo estrellado
Y en las multitudes el hombre que yo am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sonido y el abedecedario
Con él las palabras que pienso y declaro
Madre amigo hermano y luz alumbrando,
La ruta del alma del que estoy aman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marcha de mis pies cansados
Con ellos anduve ciudades y charcos,
Playas y desiertos montañas y llanos
Y la casa tuya, tu calle y tu pati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el corazón que agita su marco
Cuando miro el fruto del cerebro humano,
Cuando miro al bueno tan lejos del malo,
Cuando miro al fondo de tus ojos claros.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risa y me ha dado el llanto,
Así yo distingo dicha de quebranto
Los dos materiales que forman mi canto
Y el canto de ustedes que es el mismo canto
Y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io canto.
Gracias a la vida
Gracias a la vida
Gracias a la vida
Gracias a la vida
*
놀랄 만큼이나 계속 공기가 무겁더니 결국 장마가 왔다. 어제도 실컷 쏟아져서 조금 남아서 일을 마무리하려다가 우산이 없는 덕에(?) 친구 우산을 얻어 쓰고 퇴근. 회사에 친구가 생기니 회사에 친구가 있는 건 이런 기분이군! 하는 생각이 들고 있다. 음..
*
항상 선배들한테 많이 얻어 먹고 얻어 쓴다. 술도 많이 얻어 먹고 팁도 많이 얻고, 그렇긴 했는데. 부쩍 요즘 들어 만날 얻어 먹고 타고 쓰는 기분이... 다들 나를 동정하고 있다. 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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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뿌듯한 구매: 무전력 정수기. 겨울엔 보리차 여름엔 삼다수가 맛있어서 안 사고 1년 넘게 버텼는데, 이 집이 좀 덥고 건조한 편이라 항상 목이 마르고, 물이 떨어지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고 페트병이 너무 많이 나오며 재활용 정거장 제도가 시행되면서 페트병 버리기가 더욱 번거로워져 드디어 구매(갖가지 이유를 대니 굉장히 합리적인 소비처럼 보이는군!). 냉장고 자리는 많이 차지하지만 용량도 크고 진짜 정수기처럼 버튼 누르면 따라 마실 수 있어서 편하고 좋다. 딸려온 수질 측정기(신뢰도는 조금 의심이 가지만)로 측정해본 결과 0~50 / 50~100 / 100~150 / ... / 400~ 으로 나뉜 카테고리에서 우리 집 수돗물은 73으로 2등급 정도 됐다. 마셔도 무방하지만 조금 오염된(?) 정도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필터만 거치면 얄짤 없이 0으로 떨어져서, 측정기에 대한 신뢰도가 조금 떨어졌다. 그래도 수돗물 냄새가 깨끗하게 없어진다. 하여간 물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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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웹툰을 연재 중인 모 작가를 만나고 왔는데, 저런 성격도 타고 나는 거지... 싶었다. 4개월간 바나나 두개, 훈제란 두개, 견과류 한봉지로 (주로 야작을 하니 한밤중에) 저녁을 먹고 있고, 질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 비단 먹는 것 아니라도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고 견디는 걸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다. 나는 저런 사람은 못 되겠지.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냐 하면 그런 건 또 아니지만.) 오늘도 접대한다고 고기를 구우면서 내가 다 처먹었네. 낮에 먹은 고기 때문에 저녁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도 아직도 배가 부르다. 아침까지는 배부를 듯. 나도 가끔 내 식탐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욕심을 부리는 것은 정말 보기 싫은 일인데! (기승전 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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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작하고 여러 강좌를 시도해봤지만 (스페인어를 빼고는) 하나같이 중간에 그만두고 불성실하게 임했다. 그런데 한 세달 전부터 나가기 시작한 이 세미나는 이제 정도 붙였고 아는 사람도 생겨서 꾸준히 나가고 있다. (얼마 안 나갔는데 벌써 올드페이스가 되었다.) 문화연구 세미나라고는 하지만 사실 가서 멍때리다 올 때도 있고 지난번 주제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는데 이번 커리는 괜찮다. 대충이지만 발제도 무려 두번이나 해서, 억울해서라도 계속 나가게 될 것 같다.
저번주에는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를 읽었는데, 책 자체는 그냥 무난한 편이지만 아무래도 주제가 주제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동의가 잘 안 되는 부분들도 있고.
확실히 한국의 결혼시장은 영국 빅토리아시대나 다름없다. 에바 일루즈는 현대의 결혼이 '부자연스러워졌다'고 했지만 자유연애를 찬양하면서도 동질혼(같은 계급 간의 결혼)을 원하는 한국의 이중적인 세태는 더 부자연스럽다. 어쨌든 같이 자전하는 지구에서 결국 한국의 결혼도 전통적 관습들은 점점 사라지고 책에 묘사된 대로 굳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개전투 연애필드. 관계의 매뉴얼은 사라지고 선택의 범위는 넓어진다. 하지만 마녀사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19세기 영국과 같은 매뉴얼을 원할 것이다.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여튼 "자유로운 섹스"라는 이데올로기는 점점 퍼져나갈 것이고 이러한 변화는 낮은 계급에서부터 치고 올라올 것이다. 성적 매력에 결부된 '천하다'라는 인식은 계급 간 이동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닌가 생각했다. (아직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일루즈의 주장에 대한 페미니즘계의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어쨌든 한국의 특수성은 차치하고라도 결국 극단의 자유가 극단의 부자유를 불러온다는 이야기인데... 왜 사회가 동질혼을 덜 장려하게 되었을까? 왜 자유로운 선택이란 환상이 장려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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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나는 매몰비용을 많이 아까워하는 타입은 아닌 듯하다. 운동도 그렇고 강좌도 그렇고 거금을 들여 등록한다고 돈이 아까워서 나가는 성격은 아닌 것이다. 진짜 재밌거나 사람들이 맘에 들면 가는 거지... 일단 귀찮으면 다 귀찮고 간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앞으로는 '돈이라도 들이면 하겠지'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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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 듣는 팟캐스트는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 있네]다. 재밌어! 요즘은 사실 문학 팟캐스트도 듣기 싫고 혜리 언니 팟캐스트도 못 듣겠고 회사 팟캐스트는 (정말 진심으로 아무리 게스트가 궁금해도, 일하는 기분이라) 듣기 싫어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과학 팟캐스트가 나를 구원해주었다... (함은 나의 수면을 돕고 있다는 말.) K박사 사투리도 귀엽고 딴지 논설위원 파토도 정리를 참 잘해준다. 하아 철학을 전공한 과학 애호가라니...
(링크: https://itunes.apple.com/kr/podcast/patoui-gwahaghago-anj-aissne/id645893347?mt=2)
양자역학 적색거성 백색왜성 초끈이론 이런 단어들을 무념무상하게 듣고 있으면 어느새 잠이 오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또 잠이 오고 뭐 이런 선순환이랄까?
물리학은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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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이끼 도서로 (반쯤) 읽었는데, 분명 재미있지만 시시하다. 읽다보면 진짜 "해법"은 탈출뿐인가? 하는 의문이 들고 그렇다면 탈출하고 싶지 않은 나는 우울해진다. 천연발효종으로 빵을 만들면 정말 더 '좋은' 것일까? 탈출할 생각도 하지 않는 회의주의자라고 비난받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궁금한 해법은 상자 안의 해법이다. 상자 밖밖에 없다는 것을 나에게 설득시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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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앗 그리고 요즘 정말 즐거이 보고 있는 웹툰: 옹동스.
이 얼마 만의 스노우캣인가. 아직 죽지 않았어 스노우캣!
여러분 보세요 두번 보세요. 좀 너무 따뜻해서 부담스러워도 좋습니다.
http://page.kakao.com/home/4660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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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직도 배불러. 비 와서 산책도 못하는데 어떻게 소화를 시켜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