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침묵의 댓가

Martin Niem Iler

침묵의 댓가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나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habe ich geschwiegen;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ich war ja kein Kommunist.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가둘 때,

 

habe ich geschwiegen;

나는 잠자코 있었다.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그들이 노조에게 왔을 때

 

habe ich nicht protestiert;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나는 노조가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그들이 유태인에게 왔을 때

 

habe ich geschwiegen;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ich war ja kein Jude.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mich holten,
그들이 내게 왔을 때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아무도 항의해 줄 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박정대/ 무가당 담배클럽과 바람의 국경선

무가당 담배클럽과 바람의 국경선

박정대

 

  우연의 음악이 바람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곳에 무가당 담배 클럽이 있다, 식당 먹으러 가자, 이것은 무가당 담배 클럽의 그 흔한 농담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런 농담만을 듣고도 무가당 담배 클럽의 회원을 색출해 내는 귀신 같은 자들이 있다, 그 비밀 요원들은 바람의 국경선 저 너머에서 왔다, 그들은 무가당 담배 클럽 저편의 세계에 봉사하는 자들이다, 무가당 담배 클럽에는 이런 비밀 요원들과 회원들이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에, 막상 무가당 담배 클럽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산책을 하고 농담을 하고 때때로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누가 진짜 무가당 담배 클럽 회원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의 남자와 여자들도 어느 날은 술에 취해 밤새도록 침대 위를 뒹굴며 서로의 육체를 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몸을 뒤섞어도 서로가 진짜 회원이라는 확신을 가지지는 못한다, 간혹 또 어느 날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이 무가당 담배 클럽 회원으로 밝혀져 바람의 국경선 저 너머로 압송되기도 한다, 그의 죄는 너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가당 담배 클럽을 너무 낭만적인 분위기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지금 조용히 고백하건대(이 글을 읽는 그대들만 알고 있으라), 사실 나는 무가당 담배 클럽의 핵심 요원이다, 그런데 이런 나조차도 정확한 회원의 숫자와 그 규모를 알지 못한다, 나는 지금 무가당 담배 클럽 한구석 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젯밤 심하게 과음했더니 숙취 때문에 나는 지금 몹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몹시 힘든데 야, 식당 먹으러 가자, 누군가 또 저 건너편에서 외친다, 가자, 우연의 음악이 바람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곳에 무가당 담배 클럽은 있다, 식당 먹으러 가자

김재진/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사람과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 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 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리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 보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놓고 떠나라

 

 

바라나시, 라가 카페

제이미 제파/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1. 지구 반대편에서 뎅기열에 걸릴 확률

p. 24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p. 25

  오랫동안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했지만 내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배웠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적인 기술과 도구는 얻었지만 내가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나를 압도하는 경험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싶고,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배움을 얻고 싶었다.

 

 

 

2. 세상의 시간을 다 가진 사람들

 

p. 42

  이들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면서, 또는 가게나 사무실 창구 앞에 서 있으면서, 내 앞을 막고 있는 트럭 뒤에 꼼짝없이 갇혀 있으면서 나는 그것을 생각했었다. 빵집 문에는 분명히 아침 8시에 문을 연다고 써붙여 놓았지만 8시 20분이 되어도 문을 안 여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모든 일들이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듯했고, 시간이 많이 걸릴 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로나에게 물었다.

  "이런 일들이 당신을 돌게 만들지는 않나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린 어디로 가야 할 일도 없잖아요."

 

p. 48

  그녀는 다음 해는 더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도로에서 3일 정도 걸어가야 하는 부탄 중부의 오지로. 나는 리타가 심각한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p. 48

  나는 이따금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동료들과 함께 부탄의 식당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에 있는 식당에 있을 수도 있었다. 캐나다의 내 고향 수세인트마리에 있을 수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앗다. 나는 이 일들이 나의 나머지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의 삶, 별들이 총총한 바다를 가로질러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나의 삶과 지금 탁자에 앉아 맥주의 상표를 조각조각 뜯고 있는 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나 자신이 그 벌어진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했다. 나는 다리였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고향에서 내가 경험하고 성취한 모든 것들은 여기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지금 나는 이곳 부탄에 있었다.

 

p. 49

  나는 교육을 더 받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사샤에게 몸이 안 좋다고 말하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워 내가 바라는 것들을 상상했다. 코스모폴리탄 잡지, 크림 치즈가 들어 있는 롤빵, 식료품점, 크리스마스 이틀 전의 쇼핑 센터를.

 

 

 

3. 시간이 멈춰버린 땅

 

p. 52

  그녀는 어처구니없게도 이곳에 있는 것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내가 부탄에서 만난 서양인 교사들 사이에는 하나의 합의가 이뤄져 있는 듯했다. 그들 모두 자신이 일하게 될 마을과 학교와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특별한 시련을 좋아했다. 그들의 시련이란 쥐와 괴팍한 교장, 여름의 우기에 길을 막는 산사태 같은 것이었다. 태국이나 네팔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외국인 교사들을 팀푸에서 만났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이곳에 돌아와서 너무 기쁘다고. 집에 와서 정말로 기쁘다고.

 

p. 55

  내가 말했다.

  "정말로 이곳이 샹그릴라일지도 몰라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런 것처럼."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이 샹그릴라라고 말하는 것이 싫을 거에요. 특히 그들이 부유한 나라에서 편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p. 58

  연료를 파는 다음 장소까지 가기에도 연료가 모자란 판에 이들은 왜 다시 차를 타려는 것일까? 거기에 가더라도 연료가 없을 게 뻔하지 않은가. 이들은 눈과 안개에 덮인 외진 산꼭대기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서 누군가 우리를 찾아나서기도 전에 얼어죽거나 굶어죽기를 원하는 걸까? 하지만 너무 늦었다. 모두들 이미 차에 올라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이해할 수 없었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차에 올라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4.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p. 77

  조이 부인은 내게 왜 '그런 옷'을 입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전통 의상 키라를 내렫보았다.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은 부탄 사람들의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인조 섬유로 만든 갈색 사리와 회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난 이 옷이 좋은 걸요."

  "그 옷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조이 부인이 말하는 걸 들으면서 나는 그녀가 이름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5. 사람은 어디서나 살 수 있다.

 

p. 86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위로했다. 넌 경험하기 위해 이곳에 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여기서 경험하는 거야. 이 모든 건 문화적인 충격이며, 곧 지나갈 것이다. 안내서에는 한 페이지 전체가 도표를 곁들여 가며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일 년만 지낸 뒤,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 다신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거나 내가 처한 상황이 싫다면 언제든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싫었다.

  하지만 차마 돌아가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이 일에 신이 개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남들의 비난과 책임에서 면제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빌었다. 집에서 급한 전보가 날아오거나 로버트가 당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끝장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심각하지만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병에 걸린다면. 알약 몇 개만 먹고 토론토 종합 병원에 누워있으면 쉽게 낫는 그런 병에 걸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p.165- p.167

  사회가 복잡해지고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일이 적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토에서는 일주일에 두번 아침 시간에 쓰레기를 집 앞에 내다 놓는 한, 그것이 어떻게 되든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 부탄에서는 자신이 소비한 것의 결과를 직접 치워야만 했다.

 

(...)

 

  사숍 어에선 '버리다'와 '잃어버리다'가 같은 뜻으로 쓰인다는 것이 생각났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필요하다'와 '원하다'라는 말을 구별해서 쓰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것을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용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당신이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사숍 어 교본을 공부하면서 나는 영어와 사숍 어 중에서 어떤 언어가 더 풍요롭고 빈곤한지 새삼 의문이 들었다. 영어에는 사숍어에 없는 단어가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명사, 곧 물건의 이름들이다. 이를테면 기계, 비행기, 손목 시게 같은 것들이다. 반대로 사숍 어 속에는 물질 문화가 아니라 풍요롭고 복잡한 가족 관계와 인간 관계가 담겨 있다. 부탄 사람들은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지만, 형과 동생, 그리고 아버지의 형의 아들과 어머니의 여동생의 딸을 가리키는 단어를 따로 갖고 있다. 이곳에는 두 종류의 말이 있었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존댓말을 구별해서 쓸고 있었다. 선물을 가리키는 단어도 세 가지가 있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 낮은 지위의 사람에게 주는 선물, 동등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 각각 다른 단어로 표현되었다.

 

  마을에는 글자로 쓰여진 기록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누구누구가 사이가 좋고, 왜 그 사람이 마을을 떠났으며, 그가 떠날 때 어떤 불길한 징조가 있었는지, 또한 그 뒤에 그에게 어떤 질병과 불행이 닥치고, 그가 신에게 어떤 제물을 바쳤으며,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위로를 해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는 너무 작아서 성과 기록, 출생과 사망 증명서 없이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캐나다에 있는 내 세계보다 훨씬 더 넓고, 크고, 오래되고, 복잡한 것처럼 보였다. 캐나다에는 모든 탄생과 사망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있으며, 모든 역사는 역사책의 여러 장들로 나눠지고, 짜맞춰지고, 다듬어져서 우리는 그것을 한두 번 읽고 나면 잊어버린다. 그것은 기록되어 있으므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 기억할 필요가 없으므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이곳의 역사는 기억될 수 있도록 말로 전해진다. 그것은 말로 전해지기 때문에 기억된다. 사숍 어의 '역사'에 해당되는 단어는 '오래된 이야기를 말하다'라는 뜻이다.

 

 

p.167-168

  그날 밤, 나는 책상에 앚아 로버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도착하는 것고 들어가는 것의 차이를 나는 말했다. 도착은 물리적인 것으로 갑자기 일어난다. 기차가 도착하고, 비행기가 착륙하고, 우리는 모든 짐을 갖고 택시에서 내린다. 우리는 어떤 장소에 도착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는 그곳에 가서 대충 주변을 둘러보고, 사진을 몇 장 찍고, 간단히 메모를 하고 집으로 엽서를 부친다. 그런 식으로 여행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결코 집을 떠난 것이 아니다. 장소와 하나가 되는 것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조금씩 그 세계로 건너간다. 우리는 절망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넘어갈 수 있을까 의심한다. 그것은 여러 주에 걸쳐 서서히 깨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눈을 뜨고 마침내 그곳에 있게 된다. 진정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 막 알기 시작한다.

(...)

  아이들이 말한 것처럼 나는 이제 알아 가고 있었다. 과거의 모든 지식과 성취는 지금의 내겐 아무런쓸모가 없었다. 내가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모든 비판적인 용어, 수사와 문학의 양식, 아이러니에 대한 열세 개의 정의, 작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등은 책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은 지금의 내게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

  나는 로버트에게 썼다.

  이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p.172

 그곳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p. 175

  버스가 다시 출발했을 때 나는 푸른색 옷을 입은 그 남자가 나와 소녀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손을 소녀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소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그너가 움직일 만한 공간이 없었다. 나는 소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너의 문화가 아니야. 넌 여기에 온 지 몇 달밖에 안 됐고, 이 나라의 말조차 모른다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넌 몰라. 네가 누군데 끼어들려고 하지?'

다른 한편으론 이런 소리가 들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너무나 분명해. 이건 문화적인 차이와는 상관없는 문제야. 하지만 부탄 인이 아닌 한 그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깊은 확신이 없었고, 마음속에 갈등이 생기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남자와 소녀 사이로 끼어들어갔다. 그가 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자, 나는 그의 손을 팔꿈치로 밀어 버렸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주위에서 들리던 노랫소리가 뚝 그쳤다. 남자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얼굴을 돌렸다. 나는 소녀를 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계속 앞만 보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올바로 행동했기만을 빌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p. 194

  어떻게 그가 내가 있는 곳을 묻는지, 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써보냈는데 말이다.

 

p. 195

  교사를 존경하는 것은 부탄의  전통이며, 부모들은 채소값을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값을 치르는 일을 갑자기 중단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내겐 대수롭지 않은 액수였다. 일주일 동안 신선한 토마토와 시금치를 먹는 값이 1달러도 안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돈을 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제 다른 반 아이들도 내게 채소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수십 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시금치를 한아름씩 안고 오거나 양파와 무와 콩이 든 바구니를 들고 왔다. 그들이 가져온 것을 모두 먹을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누구 것은 받고 누구 것은 안 받을 수 없었고, 누구에겐 돈을 내고 누구에겐 안 낼 수도 없었다. 나는 잘못된 관용을 베푼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관용에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이 갖고 싶고,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마을이 나를 받아들이게 하고, 좋은 느낌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망에서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그들의 관습을 뒤엎고, 사람들에게 다른 기대를 갖게 했으며, 외국의 것을 부탄에 가져왔다. 일종의 거래를 만든것이다.

 

p. 196

  어쩌면 나는 불교 문화 속에 흡수됨으로써 저절로 지혜로워지리라고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깨어있는 마음은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p, 201

  교육의 최종적인 목표는 지식과 이해에 있으며, 회초리는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체벌은 커다란 문화의 일부분이며, 거기에는 다른 가치관이 포함되어있다. 넌 오직 너의 시각으로만, 너의 문화적 배경과 성장환경에서만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p. 205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학교들의 상황을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곳에선 교사들이 학생들을 때리지 않지만 거꾸로 학생들이 교사들을 구타하는 일이 일어나고,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는 서서히 악화되고 있었다. 신뢰가 무너지고 권위가 남용되고, 무기력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누구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북아메리카의 상황은 부탄과 달랐지만 부탄보다 더 좋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곳이 더욱 좋다는 인상을 풍긴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도 내 마음이 문제였다. 깊은 생각 없이 감정적으로 말해 버린 것이다. 나는 정말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p.207

  어떤 행동을 하는 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외국인이자 이방인이고, 이곳은 내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연 광적이고 사악한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맞는 것을 보면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다른 문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하는지, 아니면 평소의 소심한 성격대로 그냥 지나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p. 223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다. 나는 반만 설명되고, 반만 번역되고, 반만 상상된 모든 것들을 붙잡고 언젠가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다.

 

p. 227

 

  '왜냐고 묻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부탄에선 다른 역사에 바탕을 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이 작용하고 있었다. 권위에 대한 복종과 연장자에 대한 존경, 그리고 현상 유지가 부탄의 근본 가치를 이루고 있었다. 관리의 말을 문화적인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보자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객관적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p. 230

  나 또한 가끔은 사람들 속에 묻혀서 복잡한 시내를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으면서 걸어다니고 싶었다. 토요일 아침 문밖을 나설 때면 내가 어디를 가는지 신경쓰지 않는 낯선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었다. 저녁때쯤이면 친구가 나를 찾아온 것을 마을 사람 전부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만의 사생활을 갖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p. 264

  반면에 부탄에선 모든 것이 성장하고, 시들고, 죽었다. 아무것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다. (...) 부탄에선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며, 모든 것을 완벽하고 현대적으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게 모든 것이 변화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p. 275

  사실 서양에서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사생활이 이곳에서 유지된다면 치명적인 결과를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부탄에는 마을과 마을, 그리고 마을과 가장 가까운 병원, 무선 전신국, 가게 사이에 거대한 산들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웃에 의지해야 했다.

 

p. 276

  경전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지고 ,죽는다.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이어서 나는 낭만주의 시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왜 집착이 잘못된 것인지, 집착이 없이 어떻게 시가 탄생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왜 우리는 자신을 삶 속에 던지고, 세상을 깊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변하고 사라지고 죽을 때 상처를 입으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불교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와 워즈워드, 콜릿지, 셸리, 그리고 키츠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p. 276

  하지만 나는 붓다가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했다. '부지런히 자신을 구원하는데 힘쓰라.'

 

제이미가 부탄에게. p. 282

p. 282~p. 284

 

  내가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든 것에 이음매가 없다는 것이다. 난 숲을 지나서 마을로 걸어나왔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나 구별도 없었다. 나는 한 순간 자연 속에 있고 다음 순간 문명 속에 있었다. 집들은 진흙과 돌과 나무로 지어지고, 그 재료들은 주변의 땅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어떤 것도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고, 어떤 것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시간에는 분과 날짜, 계절의 느낌이 한데 섞여 있었다. 색깔은 변하고 산 너머로 기우는 햇빛은 점점 더 서늘해졌다. 나는 날짜를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학생들에게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묻고 나서, 다음 수업에 들어가서는 또다시 요일을 물어야 했다.

 

  어제 집으로 편지를 쓰면서 나는 7월이라고 썼다. 밖을 내다보니 황금색과 갈색이 주변의 모든 언덕을 물들이고 있었다. 레온은 그것이 '부탄식 시간의 휘어짐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시간은 무서운 속력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지 않는다. 변화는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 할머니와 손녀는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노래를 알고 있다. 손녀는 자신의 할머니를 상대하기 귀찮고 지루한 과거의 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손녀를 짜증나게 하지 않고, 손녀가 원하는 것은 할머니가 그 나이 때 원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을에는 어떻게든 따라잡아야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변화가 일어날 때 모든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유리창, 물결무늬 양철 지붕, 전구, 예방 주사, 학교 등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시 한구석에서 또는 바다 건너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내일이면 더 새로운 소식에 밀려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변함없이 그곳에서 기억되는 이야기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배운다. 토브게이같은 학생들이 분명히 많을 것이다. 그 학생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배운 것을 부모에게 말할 수 없다. 외부 세계가 따라올 때, 모든 것에는 가속도가 붙으며, 조부모들은 손주들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한숨을 내쉰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완전함은 사라지겠지만 발전이 항상 나쁘고 사람들이 언제나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아서 네 명을 잃고, 쉰 살에 세상을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그 만큼의 새로운 문제를 안겨준다.

 

  나는 '좋았던 옛날'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휘어진 시간'의 한 부분이 되어서 정말 기쁘다. 토론토에서 보낸 마지막 해를 기억하면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강의실과 식품점, 은행으로 허둥지둥 달려가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언제나 아직도 따라잡지 못했다고 느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워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보고, 사고, 해야 하는 최첨단의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이 있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고, 그것들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풍족한 시간을 갖고 있다.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다른 어디에도 갈 필요가 없고, 그냥 여기 있으면 된다.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전쟁이나 기근이 10초짜리 뉴스로 탈바꿈하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신기술이 사람들의 죽는 방법, 꿈꾸는 방법, 은행을 이용하는 방법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타시강에서 손목 시계를 잃어버리고,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의 숫자판은 습기가 차서 흐릿해졌지만, 나는 태양의 기울어짐과 밖에서 들리는 소리로 시간을 아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이제껏 강의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잠에 빠지듯 나는 이 세계에 빠졌다. 어둠을 한 겹씩 통과해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듯 나는 이 세계에 빠졌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듯 나는 이 세계에 빠졌다. 이곳의 풍경이 나는 마음에 든다. 초록색 산들이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푸른색 그늘로 바뀌고, 매일 아침 태양이 은빛 계곡 위로 눈부시게 솟아오르고, 비가 그친 뒤면 모든 것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선명해지며, 계곡 아래로 빗줄기가 떨어지고, 어둠이 밤을 온통 채우고 있는 이 풍경들이.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내 삶의 단순함, 소박한 내방과 장식품 하나 없이 텅 빈 선반, 그리고 꾸밈없는 벽이 마음에 든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가고 싶지 않다. 아니 영원히 집에 가고 싶지 않다.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아무도 내게 이것에 대해 경고해주지 않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제이미 제파

 

p. 291

  학생들은 자주 그런 태도를 보여주었다. 내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그들은 두 가지 모두를 좋아했다. (...)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믿는게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는가, 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 수십억 년의 전생 동안 모든 존재는 한 때 우리의 어머니였다. 내가 니마에게 말했다.

  "그래, 나도 그것을 읽었어. 하지만 그걸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니마가 말했다.  

  "교수님도 알다시피, 중요한 건 믿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거에요. 중요한 건 교수님이 어머니를 대하듯 실제로 모든 존재를 대하느냐 하는것이죠. 그렇듯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갖고 말이죠. 물론 우리 부탄인들에게는 믿으면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죠. 하지만 교수님이 믿으면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p. 294

  나는 두 가지를 모두 배우고 싶다고 계속 말했지만, 양쪽 모두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마치 둘 다 선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듯이.

 

p. 295

  "하지만 부탄이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정말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한 나라가 민주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서로 소곤거릴 뿐이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다그치듯 물었다.

  "그런데 너희가 생각해 보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지?"

 

 

17. 인도에서 보낸 겨울 방학(p.309)

 

to be continued....
 cf) p. 294 관해서는 에이번리의 앤

17. 인도에서 보낸 겨울 방학

 

p. 319

 

  부탄은 들어가기가 무척 어렵고, 매우 특별하고 아름다운 곳이어서, 내가 부탄에 있는 것은 단순히 운이 아니라 나의 굉장한 능력이라는 자부심에 부풀어 있었다. 그것은 부탄과의 관계에 따라오는 위험성 중 하나다. 처음에 우리는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는 그것이 자신의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를 봐, 여기 있는 나를 보라구! 부탄은 특별한 나라이고, 나는 부탄에 있다. 그러므로 나 또한 특별한 게 분명하다. 여행은 우리를 더욱 거만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겸손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와 외국인 교사들 역시 모두 여행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2주를 머물든 2년을 머물든,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이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18. 뼈아픈 실수

 

p. 329

 

  불교의 수행 속에는 한 순간에 고백하고 용서하는 신앙 고백이 없었다. 불교는 지속적이고 가차 없는 내면의 정직함을 요구했고, 나는 나의 행동, 곧 학생과 생각 없이 동침한 것 과 샤쿤탈라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 것을 마주볼 때까지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것과 직접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p. 335

 

  나는 너무 많은 가면을 쓰고 있어야 했다. 이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잘못된 것이 없으며, 어떤 학생도 운동에 가담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민병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9. 사랑의 시작

 

p. 340***

 

  디니는 부탄의 풍경에 대한 나의 사랑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맗팼다.

  "당신은 어떤 것을 이곳에 투영하고 있는 거에요. 그것은 당신의 문화 속에 없다고 느끼는 것들이죠. 이를테면 산업화 이전의 세계나 자연과의 교감, 샹그릴라 같은 이상향들이죠."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평화와 만족을 느끼고 있어요."

  "그리고 가난하죠."

  "맞아요. 물질적으론 가난하죠."

  그녀의 말에 동의하면서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비참하진 않아요."

  그녀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 다르죠?"

  나는 시골사람들의 삶이 어렵고 부족한 게 많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 곧 물질적인 부에 대한 욕망과 개인의 소유가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일 거라고 했다. 디니는 그들이 만족하는 이유는 지금 가진 것이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깊이가 있겠느냐고 디니는 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들의 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만일 차와 냉장고, 비디오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이곳에 세계 시장의 굉장한 물건들을 풀어놓는다면,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할 것이다. 나는 팀푸에서 보았던 비디오 가게와 공기 청정기, 물고기 모양의 컵받침을 기억했다. 디니는 부탄 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바퀴 달린 쟁반을 원한다면 왜 그걸 가져선 안 되죠? 당신은 부탄이 소비재 수입을 금지하길 원할 거에요. 그것들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마술적인 세계에 대한 당신의 별난 환상을 망쳐버릴 테니까요. 말하고 보니 수많은 환경론자들이 인도에 와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고 떠드는 것이 생각나네요. 그런데 인도인들도 원한다면 차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모든 미국인들은 차를 갖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군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봐요. 당신의 마음속에서 부탄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어요. 하지만 부탄이 진정 무엇인지는 부탄 사람들만이 알고 있어요."

  나중에 나는 물이 찰랑이는 논에서 모를 심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디니의 날카로운 칼에 내 감상의 한 부분이 잘려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족은 질퍽거리는 논 한가운데 서서 허리를 구부린 채 모를 심고 있었다. 그들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논둑에는 세 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넓은 천을 뒤로 둘러서 어린아이를 업고 있고, 업힌 아이는 뒤에서 손을 물어뜯으며 보채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계단식 논은 서서히 푸른색으로 덮여 갔다.

  나는 숲에서 꺾은 진달래 꽃을 한아름 안고서 그곳에 서 있었다. 그 광경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거기서 나는 목가적인 농촌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또는 허리를 구부리고 고통스런 노동을 하는 가족과, 쉽게 예방할 수도 있는 병에 걸려 죽은 두 아이의 유령, 그리고 살아남은 자식들에게 신발과 교복도 사줄 수 없는 궁핍함을 볼 수 있었다.

  부탄을 낭만적으로 보기는 너무나 쉬웠다. 풍경은 우리에게 대답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없다. 이곳의 삶은 당신의 생각과 다르고, 만일 당신이 모든 조각들을 덧붙인다 해도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해 줄 수 없다. 내 삶은 이곳에 매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풍경을 좋아할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다른 삶을 위한 경치 좋은 배경일 뿐이었다. 내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 척박한 땅을 일궈서 간신히 먹고 사는 농부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풍경을 좋아했지만, 그곳의 삶은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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