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19 Terri (2011) / 지구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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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i (2011), Azazel Jacobs
테리 
http://www.imdb.com/title/tt1687281/

We've all been there. 라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고등학교 루저들의 삶. 공감이 안 갔던건 내가 공감할 능력이 없어서 + 영화가 모자라서. 역시 좀 뻔한 구석이 있다. (The same description could apply to “Submarine” and“The Art of Getting By,” restricting ourselves only to films currently playing in theaters.(nytimes, A.O. Sc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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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귀여운 포스터와는 반대로 매우 쎈 영화. 시각적으로 힘들고 스토리도 힘들다. 안타깝게도 스토리가 어디로 갈 지 예측할 수 없게 흘러가다가 결국엔 클리셰로 흘러가 버린다. 처음에 볼 때는 충격적인데 알고나면 뻔해보인다. 병구(?)의 배경이 드러나면서부터 뻔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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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확신에 가득차서 써야 한다. 배수아의 당나귀들 중에서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언제나 그녀 자신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수진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스스로를 충분히 오만하다고 느꼈으며 그 사실이 가슴이 벅차도록 통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거리의 모퉁이마다, 카페마다, 식당마다, 극장마다, 역의 플랫폼과 금요일의 디스코마다, 건널목의 신호등마다 심지어는 학교의 학부모 모임과 홍등가에서도 그녀와 똑같은 벅찬 가슴을 펴고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시아 출신의 여자들,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을 단 1초만 흘끗 스쳐 보기만 해도, 그들이 수진과 너무나 같다는 것을, 너무나 같은 이유로 떠나왔으며 너무나 같은 이유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손에 여권과 다른 한 손에 비행기 티켓을 움켜쥔 현대판 여전사들의 군대가 전 세계의 거미줄 같은 실시간 항공 노선을 따라 오만에 가득 찬 눈빛을 창처럼 앞세운 채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수진은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박살 내지 못하는 유람 부인에 머물고 말리라.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쓰지 못하리라. 사실 그녀는 여권과 티켓을 손에 움켜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며 자존심 상하게도 고향에서 송금까지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니던가. … "

이 정도는 잔인해 줘야 되는거다. 폐부를 찔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글은 잔인하게, 강하게, 간결하게. (사실은 나 혼자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일지도!) 


 

110719 잡년행진, 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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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월 하순이야! 어휴. 시간 잘 간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잠이 깨서 좋다. 음식이 싱거우면 소금을 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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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년행진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한숨이 푹푹.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피해자에게 “성추행으로 고소하면 한 남자의 인생이나 인격을 모두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봤느냐”고 묻는 검사도 있었다." 마음이 콕콕. 어이가 없어서. 왜 세상엔 상식이 통하지 않을까.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면 내 머리로는 풀 수 없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들도 많지만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상식도 통하지 않는 것도 보면. 가슴이 턱 막히고 답답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고. 세상에 화가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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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 덧붙이자. 여러 사람이 죽는 소설이다. 한 인물이 죽을 때, 다른 인물들이 반드시 울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만큼은 몰래 울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의 차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청춘들을 향한 뜨거운 애정에서 출발했을 이 소설에서 그 울음소리가 희미하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 아쉬움을 굳이 감추지 않는 것이 내 환영의 방식이다. 논쟁적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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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부럽지만 내가 이 년 전에 썼던 일기를 복기하는 수밖에 없다. 계속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기사를 읽고 좋은 영화를 봐라. 음악을 듣고 노래를 해라. 걱정하지 말고,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 선택하고. 


 

110629 Open Mic


내가 오픈마이크에서 뭔갈 하는 건 싫지만, 뭐 어쨌든 좋은 행사다. 아무리 그 곳이 맘에 안 들어도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 이렇든 저렇든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다. Rob이 기타를 연주했다. 인간적으로는 맘에 안 들지만 잘 하는 건 인정해야겠다. 자작곡인듯 한 데, 가사가 괜찮았다 (as always, I didn't listen to all of 'em... still). 뭐 그래도 인정 해야겠다. '뉴욕'에서 공연도 하시고 글도 쓰시고 기타도 쫌 치시고 하시는 분이니. 그래. 쳇. 흥. 성격? chemistry?를 떠나서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Sudan에서 여기까지. How the hell?  

인간에 대한 이해가 참 부족하다고 생각했던게, 저 사람은 정말 왜 저럴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일본 아줌마/할머니를 보면서 참 기이한 사람이라고, 어떻게 50대, 영어도 못 해, 기타를 잘 치는 것도 아냐, 왜소한 몸에, 당신에겐 어떤 삶이 있었던 걸까? 왜 당신은 여기 있는 걸까? 정말 어떻게? 

김연수는 여기서 소설이 출발한다고 했지. 나도 출발하면 얼마나 좋을꼬 (ㅋㅋ) 이해한다면 나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 군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말을 지하철에서 약간 이해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왜 저 사람은 저런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 (진짜 진지하게). 정말 이해까지 할 순 없겠지만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지금은 사람을 대충 보면 stereotype화 해서 입력시키는 정도에서 그치는데, 그걸 넘어서는 사람이 나오면 당황한다. 내 분류체계에 맞지 않는 사람. 또한 사실 카테고리에 입력시킨 후에는 (사실 카테고리가 몇 개 없다. 맘에 드는 사람, so-so, 맘에 안 드는 사람.) 예를 들면 롭은 맘에 안 드는 카테고리에 속하고 샤넬이나 대닐은 so-so. 뭐 소수의 내 친구들은 맘에 드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분류한 다음에는 크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jerry같은 사람을 만나면 엄청 당황스러운거다. 뭐지 이 인간은? (ㅋㅋ)

흑인 아줌마/Jonesy를 보면서 comedy와 profanity의 경계. 흠. 저급하면 웃길 확률이 크긴 하지만 그저 offending할 수도 있다. 실제로 Jonesy에게는 Dude, you're hilarious but you're in a wrong place for that joke라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이것도 위로라고. 사실 뭐 엄청 clever한 comedy는 아니었지만. 흠. 한 명은 모두들 안 쓰는 척 하는 profanity를 건드림으로써 사람들을 엮는 것 같다고도 이야기 했는데. 뭐 맞는 말도 약간 있긴 한데... 사실 어느 정도까지가 웃긴거고 어디서부터 그냥 저질이 되는 건가. Oh what, now the joke's offensive? 사실 관객의 한 명을 표적으로 삼고 웃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턴 좀 불편해진다. 저 사람이 저걸 얼마나 웃어 넘길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크리스티와 내가 항상 싸우는 지점이 어디까지 희화화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하는 질문인데. 음. 아 그리고 마지막 흑인 남자는 그저 offensive했을 뿐. 그리고 집에 가면서 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가는 걸 보고 내가 그들을 몰랐다면 정말 짜증난다고만 생각했을 텐데. 음. 

그러니까 사람은 대단하다고? not that. 내가 얼마나 stereotype에 갇혀있는지 깨달으면 정말 깜짝 놀란다. 사실 Jonesy같은 사람을 실제로 만났다면 뭐야 쟤 무서웡 하고 피했을텐데. 내가 약자라는 자의식 또한 나를 견제하는 것 같다. 

insight을 나누겠다는 사람을 보면 어이없ㅋ엉ㅋ했지만 뭐 그렇게 배배 꼬여서 볼 것만도 아니다. 쩝. 

Jerry를 보면 항상 마음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나쁜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너무 순수해서. 매번 그의 모놀로그나 뭐 갖가지 bits를 보면서 감탄한다. 그리고 이 인간도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꼭 그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파란 눈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 눈이 내가 얼마나 속물인지, 썩었는지, 진정성이 모자란지 깨닫게 해준다. 절대 날카로운 방법이 아닌 정말 고맙습니다! 하는 눈빛?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진심으로 믿음을 가진 눈빛이라서 더 그렇다. 내가 해 준 짧은 조언에 정말 고맙다는 그에게 나는 하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그 조언을 할 때도 나는 진심이었지만 부끄러워서 casual하게 말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만큼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걸 부끄러워/어려워 하는 나다. 또한 주위에서 그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아서 몹시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을 아무도 appreciate해주지 않고, 사실 시나리오 하나를 써 낼만큼 dexterity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면서, 이혼(당)하고,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의 열정을 놓지 않은, (물론 그는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더욱 대단하다.) 사람인데. mopping이나 시키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는 게 할 수 있는 다이고, 조직에다 얘기를 하고 싶은 심정인데. 여기서 나의 소시민적인 면을 마주하면서 더 부끄러워진다. 

또 생각한 건, 여기서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에 팔 걷고 얘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서도 얘기할 수 없을 거라는 거다. 이걸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매우 겁이 나는데, 그건 이걸 인정함으로써 내가 엄청나게 못난 놈이 되기 때문이긴 하다. 정말 잃을 것이 없는 지금도 옳지 않다는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지금은 못 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정말 잃을 것이 생긴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대답해라 최지수.

또한 제리가 쓴 모놀로그를 보면서 생각한 것. 한 단락을 써도 world가 그 안에 존재하는 것. 약간의 익살은 필수. 완결된 구조라는게 느껴졌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 단락을 써도 세상을 담고 싶다. Moral을 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한다. 뻔한 교훈을 담는게 아니고 음. 뭐를 표현해야 하는 걸까? 


아. 그리고 좋은 사진 한 장을 찍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열 장을 찍어내는 게 어려운 거다. 는 말처럼. 좋은 음악 10. 좋은 영상 10. 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영화는 좀 예외인 듯 싶다만)

110625 배수아 당나귀들

<당나귀들>/ 배수아

p.11 신념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의 정신적 경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

p.29 이성 없이 살찜을 선택한 역사가 그대로 내 안에서 나날이 그렇게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야!

예술이란, 어떤 견해에 의해서라면,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거야. 그 중의 하나는 지금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칭송해. …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직 그것이 스스로가 추구하는 존재의 반영으로서만, 슬프지만 실패할 것이 분명한 그 끝없는 추구의 도정에서만 머물기를 원하는 것들이야. 그것이 추구하는 영역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이 멀고도 고귀해서 그 누구도 지상의 손길과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로 그 자신이 구제 불능의 장님이며 ‘이제 이루었다!’라는 환희의 선언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기 때문이기도 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가고 있지.그런데 누군가 길을 막고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하고 묻는다면 ‘나는 눈멀고 귀먹은 어리석은 당나귀요, 나는 내가 이룬 것이 아니요, 나는 내가 가진 것도 아니며 단지 내가 추구하는 것이지요.’하고 대답하겠지. 그가 쫓는 것은 아마도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어쩌면 영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고 그가 최대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추함’정도 겠지.

내 생각에, 너는 그냥 예술의 이상화된 아마추어리즘을 극단적으로 미화하는 거라는 느낌이 든다. 아마 그러고도 싶겠지. 왜냐하면 네가 거기서 발을 빼기 싫어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또 영원히 도달할 수도 없을 운명인 그런 몽상적 아름다움에만 가치를 부여한다면, 궁극의 가치를 오직 그렇게 추상적인 것에만 둔다면, 여기 현상으로 분명히 자리 잡고 있는, 살고 사랑하고 슬프고 격렬한, 이 인간의 직접 실존은 도대체 다 무엇이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세월을 성장하고 마침내 피어난 그런 예술들은 다 무엇인지, 

T의 반박을 듣게 되자 나는 들뜬 열정의 벼랑 위에서 바로 현실의 바다로 낙하해 버린 가마우지 꼴이 되어 바로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난감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바로 ‘말 더듬는 상태’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은 몽상의 시작이야. 그러나 나는 삶이 몽상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네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어. … 적어도 나는 가능한 한 최경계에서 작업하고 싶어. 이미 완성된 문법과 처녀지 사이에서. 

p.241

그 책은 작가의 상상력을 사색력과 결합해서 아주 유연한 솜씨로 흥미로운 스토리를 에세이의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도록 만든 것으로 보였다. 어쨌거나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경계를 넘어선 글’의 작가였다.

p.249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언제나 그녀 자신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수진이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스스로를 충분히 오만하다고 느꼈으며 그 사실이 가슴이 벅차도록 통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거리의 모퉁이마다, 카페마다, 식당마다, 극장마다, 역의 플랫폼과 금요일의 디스코마다, 건널목의 신호등마다 심지어는 학교의 학부모 모임과 홍등가에서도 그녀와 똑같은 벅찬 가슴을 펴고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시아 출신의 여자들,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을 단 1초만 흘끗 스쳐 보기만 해도, 그들이 수진과 너무나 같다는 것을, 너무나 같은 이유로 떠나왔으며 너무나 같은 이유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손에 여권과 다른 한 손에 비행기 티켓을 움켜쥔 현대판 여전사들의 군대가 전 세계의 거미줄 같은 실시간 항공 노선을 따라 오만에 가득 찬 눈빛을 창처럼 앞세운 채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수진은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박살 내지 못하는 유람 부인에 머물고 말리라.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쓰지 못하리라. 사실 그녀는 여권과 티켓을 손에 움켜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며 자존심 상하게도 고향에서 송금까지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니던가. … 

p.251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이 나를 감동시켰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막대한 유산상속을 포기했고(그가 보통 일반적인 선으로 생각되는 대로 자신 몫의 유산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든지 하는 자선의 행위조차 피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공리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돈이 있어야 행복해지고 정신적 업적도 이룰 수 있다는 범속한 상식에도 반대한 듯이 보인다) 시골의 무지한 농부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진해서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문학이나 예술, 위대한 정신도 갖추지 못한 작고 가난한 마을 트라텐바흐의 교사로 간 일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 그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삶의 곤궁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교육을 좀 더 나은 삶의 수단으로 제공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학생들에게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그의 연인이자 천재 수학자 프랜시스를 기계공이 되게 했듯이 트라텐바흐에서는 농부의 아이들에게 정신의 진보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고 그는 트라텐바흐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만 받은 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생의 한가운데, 검은 당나귀 / 루이제 린저 

느림 / 쿤데라

가자에서 눈이 멀어 / 헉슬리

+ 요즘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 것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도대체 어떻게?

110624 김혜리 기자

김혜리 기자님 엉엉엉 김연수님 흐억.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2007&article_id=59962

누구보다 언어의 가능성을 신봉하는 사람이 작가고, 시네마의 힘을 믿는 사람이 영화감독이라고 우리는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 역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구가 가진 결함과 연약함을 누구보다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술가들의 일이란 어쩌면 그 불완전함의 굴곡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도달불능점을 기어코 손으로 감촉하는 일이 이 세계에서 그나마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임을 수긍하고 실천한다. 궁극적으로 실패함으로써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을 증명한다. 거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무용한 아름다움이다.

그렇다. 어떤 한 장르의 가장 큰 한계는 그 장르를 규정하는 도구(문자, 영상, 소리)이고 어떠한 작품이 가장 빛날 때는 그 한계를 가장 빛나게 드러냈을 때이다. (“어떠한 형식을 통한 예술이건간에 그 예술이 가장 빛날 때는 그 형식의 ‘제약’을 반대로 이용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역사소설을 쓸 때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하십니다. 고증에서 상상력으로 갈아타는 지점을 어떻게 정하세요?
=상상력 자체가 자료에 기초해요. 자료로 더이상 알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자료를 보죠. <꾿빠이 이상> 같은 경우 마지막 순간에 이상이 갖고 있었던 마음이 가장 중요한데 그건 자료가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에요. 그 부분을 제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읽는 이들이 자료로 써진 부분을 읽으면서 유추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게 제가 한 작업이었어요. 그게 인문학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어떤 진실의 순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쓰지 못해요. 방계의 정황들로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으면 제일 좋다고 생각하죠.

예컨대 1940년에 태어나 60년에 대학 들어간 인물을 쓴다면 그 무렵 그가 읽었을 법한 책을 무작위로 읽어 그의 교양수준, 접했던 어휘, 감각적으로 노출됐던 폭력, 인식의 지평을 체화해야 해요. 그렇게 인물의 상태를 파악한 다음, 극적인 상황에 던져놓아야 고유한 행동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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