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해당되는 글 67건

  1. 2013.10.24 131024 빅 씽크
  2. 2013.10.09 131009 새로운 적성
  3. 2013.10.07 131007 Just in time
  4. 2013.09.07 130907 그간의 일기 1
  5. 2013.07.23 130722 제임스 설터, 던컨 한나, 에드워드 호퍼
  6. 2013.07.23 130723 기린과 드롭박스
  7. 2013.07.15 0715 일기
  8. 2013.03.15 130314 부산 출장
  9. 2013.01.10 일기
  10. 2012.12.24 121223 둘로스, 박경숙 첼로 앨범

131024 빅 씽크


*


OK를 마치고 회사에서 이것저것 검토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유튜브에서 지젝의 이런 동영상을 보고 




Big Think가 뭐지? 테드 같은 건가... 하면서 들어가보니 이런 동영상이 있었다.




"Big think edge is the only forum on youtube designed to help you get the skills you need to be successful in a rapidly changing world."


듣고 토할 뻔. <성공을 위한 3분 인문학> 이런 건가... (대부분의 동영상은 2분도 채 안 된다!) 잡티 하나 없이 하얀 배경에 저명한 철학자, 기업가, 경제학자... 등이 나와서 '당신의 커리어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채널이랍니다! 와하하 



*


그나저나 요즘은 모든 게 지겹다. 지젝의 "Why be happy when you can be interesting?" "Optimism of Melancholia" 이런 것도 '예상 가능한 말'로 들린다. 새로운 것 없을까. 

131009 새로운 적성


새로운 적성을 발견했다: 인테리어. -_- 


어제는 더러운 싱크대 벽에 타일을 붙이고 오늘은 콘크리트 벽에 해머드릴로 구멍을 스물네개나 뚫고 목공소에 가서 선반 목재를 구입해왔다. (비록 어제는 싱크대 썩은 나무를 만지다가 부숴버렸지만...) 내일 회사 가서 자랑해야지. 콘크리트 벽에 드릴 박는 사람이라고 내가! 


집이 너무너무 좋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넓고 좋은 집이니 열심히 꾸며서 집순이가 되어야지. 공간분리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침실과 작업공간이 분리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삶의 질이 다르다니. 침대에 누우면 딱 자는 느낌이라서 좋다. 예전엔 노상 침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내가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분간이...(-_-) 


너무 좋아서 버리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 하지만 너무 금욕적인 것보단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을 더 잘 꾸려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소 과소비일지라도.




*


쇼스타코비치 왈츠 2


아니 쇼스타코비치가 이렇게 찌질찌질하게 생겼다니! 




131007 Just in time


프로젝터를 상설한 기념으로(?) 오랜만에 영화들을 틀어봤다.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비포 선셋을 틀었다가 요즘은 주 관심사가 홈 데코이기 때문에 셀린의 방을 유심히 살펴보고(컨셉을 바꾸기로 했다) 니나 시몬을 연속해서 들었다. 


그 유명한 대사 "baby, you're gonna miss that plane"를 하며 부르는 노래가 바로 Just in Time. 다른 커버들도 좋지만 니나 시몬이 부른 느낌과는 사뭇 달라서 깜짝. Julie Andrews가 나오는 저 영상은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하다. 줄리 앤드루스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으니 저 여자가 노래를 저렇게 청아하게(!) 부르는 사람이었나 새삼 놀랐다.








130907 그간의 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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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2

책모임을 가졌다.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었다. 좋은 에세이집이었다. 내가 모임에서 기대하는 바와 모임이 나아갈 방향이 자칫하면 어긋날 것 같고 구성원들이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우려가 됐다. 좋은 세미나(?) 모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더 열심히 조사를 해가야 겠지만 나만 그렇게 해서는 소용이 없을 테고, 한 사람이라도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임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이 모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매우 희망적이었는데 으어- (그래도 아직 포기할 단계는 전혀 아니고, 좀 열심히 해보려는 의지가 필요할 듯)


130823-130901

후딱 짐을 싸서 라오스로 갔다. 라오스, 특히 루앙프라방은 천국이었다. 흐엉엉.



후진 핸드폰 카메라지만 이 정도는 나온다규. 


130901

라오스에서는 분명히 한국에 돌아가서 일상에 쏟아부을 에너지가 넘쳐났는데, 엄... 돌아오자마자 일요일은 떡실신. 그래도 다음 주에 방콕을 가야 할 정도는 아니므로 99% 취소할 듯. 1%의 돌발상황을 위해 아직 취소는 안 했지만... 일단 이사 갈 집부터 구해야...


130902

헝거 게임을 보았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황금시대 들으면서 오다가 급 발동해가지고. 캣니스 에버딘이란 이름이 Katniss Everdeen이라고 쓰일 줄은 상상도 못했시유. 오랜만에 신나는 할리우드 영화였다! 후속작도 기대됨. 





포스터는 좀 별로임. 사실 포스터 때문에 안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제니퍼 로렌스는 윈터스 본에서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윈터스 본은 던디의 웬 대학 기숙사에서 봤지. 영국과 호주의 기숙사들이란 다 똑같이 생겨서 벽돌 위에 연한 병아리색을 칠해놓은 벽돌벽에 흰색이나 버건디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쓸데없이 무거운 문과 진한 남색 카페트가 있고, 헨리 청소기가 구석에 처박혀 있다. 나도 청소기를 산다면 헨리를 갖고 싶어! 




안뇽 난 헨리야 



헨리 미니어쳐


기승전헨리?



130722 제임스 설터, 던컨 한나, 에드워드 호퍼

나가기 전까지 약간 시간이 남으니 일기를 좀 써보기로 한다. 


어제의 나를 힘들게 한 문단. 띠지의 위력을 알았다? 


알았다고 설터 읽으면 되잖냐고! 실은 제임스 설터는 조금 무서워서 안 읽고 있었다. 아마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부드러운 몰락'에 관한 이야기쯤이라고 말한다면 제임스 설터는 그냥 몰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모든 초월적인 버팀목들과 자발적으로 단절한 우리 근대인들이 치르는 대가는 이것이다.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인생 그 자체와 싸우며 보낸다. 근대 이후의 위대한 장편소설들이 대체로 ‘시간과 의미’라는 대립 구도 위에 구축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명한 악과 싸우는 로망스적 영웅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와 대결하는 신경증적 영웅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성공이 아니라 실패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의미란 무의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는 것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제임스 설터는 이 모든 것을 거의 무정할 정도로 정확하게 해낸다. ‘정확하다’라는 평가는 우리가 소설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설터가 어떤 감정을 묘사하면 그것에서 불명확한 것은 별로 남지 않는데, 그럴 때 그는 마치 다른 작가들이 같은 것에 대해 달리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悲感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신형철(문학평론가)






표지화는 Duncan Hannah



http://www.modernisminc.com/artists/Duncan_HANNAH/thumbnails/


The Honey Trap



The Isle of Islay

The Isle of Islay


The Czech Spy

The Czech Spy

이거 참 멋있는 언니군.


The Parisian Spy

반면에 파리 스파이 언니는 별론걸?

http://www.modernisminc.com/artists/Duncan_HANNAH/?image=The_Parisian_Spy

맘에 안 들어서 그림은 뺐다. 



 

에드워드 호퍼 같은 느낌이 난다. 

아래는 에드워드 호퍼. 


분명히 김혜리 기자 글에서 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음. 어디서 본 거지. 인상적인 글이 딸린 책이었던 것 같은데.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받은 약간의 충격. 이 그림은 뭐지? 아무것도 없는 이 평범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 적막감과 외로움.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나 외로운 그림들이다. 여기에 현대인이고, 단절이고, 소통이고 그런 수식어를 붙이기도 싫은 그런 단호한 외로움. 


뻔한 구도와 채색, 관습적인 인물들과 새로울 것 없는 아이디어로 이루어진 그림 같은데, 결과물은 여전히 날카롭다. 너무나도 미국적이어서-그것이 날카로운 묘사이건 아니건 간에- 보자마자 불편했고 싫었지만 가끔 이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었다.  


으. 이런 그림 좋아하는 사람 되고 싶지 않았다. 


Nighthawks


Office Night


Chair Car



130723 기린과 드롭박스


*


드롭박스에 생각보다 사진이 많아서 놀랐다. 일부러 과거의 사진을 찾아본다든가 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으음. 이것은 이번 겨울 사진입니다. 





좋은 사진이구나. 으음.


나는 연인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볼 때 내 얼굴에 먼저 시선을 돌리는 유형의 인간이다. 드롭박스 사진을 보면서는, 나의 행복하고 구김살 없는 얼굴을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과도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으음. 중증이야. 


*


써놓고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던 잡소리. 



-



기분이 안 좋을 땐 기린을 검색해보곤 한다. 예를 들어 오늘 같은 날은 구글에 'giraffes'를 치고 멍하니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다 구글에 'can you ride a giraffe'를 검색해보고 이것이 나만의 페티쉬가 아님을 확인한다. 참고로 can you ride a 까지 쳤을 때 자동완성 1위는 zebra. 얼룩'말'이라서 사람들이 궁금해한 건가? 그보다 대체 왜 얼룩말 따위를 타고 싶은 걸까. 


여튼 고화질 기린 사진들을 감상하면서 이 우아하고 사랑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동물에게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구석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현듯 내가 이 동물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검색을 시작했다. 


"기린의 다리는 1.8미터로 웬만한 성인보다 크다. 다리가 기니 최고 시속 56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다. 기린은 혀조차 길다. 53센티미터에 달하는 이 혓바닥은 나무에서 잎사귀를 훑어낼 때 아주 적합하다."


구글에 giraffe tongue을 검색했다. 기린에게 사랑하지 못할 구석이 없다는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저 검은색 혓바닥은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그 혓바닥으로 나를 핥지만 말아줘.





0715 일기


그동안 블로그가 싫었던 것은 혹시 스킨 때문이 아니었을까. -.- 스킨을 바꿨더니 확실히 기분 전환이.


오늘은 정신을 차려보니 12시 넘어서 깼다. 참으로 잉여로운 하루... 일어나서 대충 뭐 좀 먹으려고 보니 먹을 게 하나도 없길래 만두를 사먹고 싶어서 나갔는데 비가 와서 그냥 편의점에서 라면과 오징어와 육포와 생수- 사면서 뭐 이렇게 거지 같은 구매목록이 있나 했다-를 사들고 왔는데 라면에 표고버섯 넣어 먹으려고 불리는 사이에 프렌즈 보면서 오징어를 먹다보니 배가 불러서 그만 잠들고 많았다는 잉여의 이야기.


일어나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갑자기 떡꼬치가 먹고 싶어져 백만년간 벼르던 떡꼬치를 만들고 다시 누워서 어제 마저 못 본 영화를 봤다. 



몰락

Downfall 
8.9
감독
올리버 히르비겔
출연
브루노 간츠,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 코리나 하파우치, 울리히 마테스, 율리아네 쾰러
정보
전쟁, 드라마 |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 156 분 | -


실은 오늘 마스터를 보고 싶었는데 모든 것은 우천취소하고. 

Downfall (원제는 Das Untergang) 


트라우들 융에를 연기한 배우가 무척 이뻤다. 

이것은 실물 Traudl Junge http://en.wikipedia.org/wiki/Traudl_Junge

1942년부터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다. 히틀러의 자살까지 함께 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젊은 추종자'로 분류되었다.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한 마지막 3년

저자
트라우들 융에 지음
출판사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 2005-05-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50년 만에 입을 열어 ‘인간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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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암으로 죽기 전에 회고록을 냈다.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있네. 그 전까지는 학계 관련 연구에서나 미디어에서 주목을 별로 받지 않았지만 이 책을 기점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아래는 인터뷰 동영상.





영화 엔딩의 인터뷰 클립에선 이런 말을 한다. 



Of course the horrors, of which I heard in connection of the Nuremberg trials, the fate of the 6 million Jews, their killing and those of many others who represented different races and creeds, shocked me greatly, but at that time I could not see any connection between these things and my own past. I was only happy that I had not personally been guilty of these things and that I had not been aware of the scale of these things. However, one day I walked past a plaque that on the Franz-Joseph Straße (in Munich), on the wall in memory of Sophie Scholl. I could see that she had been born the same year as I, and that she had been executed the same year when I entered into Hitler’s service. And at that moment I really realised, that it was no excuse that I had been so young. I could perhaps have tried to find out about things.



두시간 반이나 되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전쟁의 끝을 앞두고 벙커 안에서 불안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술과 담배 그리고 파티로 시간을 보내는 장면. 현실감을 잃은 그곳에서 트라우들 융에가 울음을 터뜨리고 쓰러지는 장면이 굉장했다. 유튜브 클립이 있으면 좋으련만 @_@


Hitler's rant로 검색하면 나오는 장면에서는 예전에 본 패러디가 생각나서 진지하게 볼 수가 없었다. 


음. 


프렌즈 그만 봐야 하는데. 그냥 넋을 놓고 보게 된다. -.-



아. 트라우들 융에 연기한 독일 배우. 헐 부카레스트 출생...

g

흐엉 이쁘다...

물론 나는 고전적인 헤어스타일을 조아하기 때문에


더 이쁘구랴

130314 부산 출장



서울대 2만명이 모두 운동권이었어. 서울대, 연고대 애들이 데모를 참 잘 했지. 우리 땐 혁명이 노후준비였는데... 노후준비가 어딨어, 혁명이 노후대비였지. 요즘 사람들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그런 위기의식이, 있는 거죠. 


광주 전까지만 해도 운동권들의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였어요. 하지만 광주를 겪고 사회주의로 바뀐 거지.


요즘의 노동운동은 질 것 같으면 싸움을 하지 않아. 쎄 빠지게 투쟁할 필요가 뭐 있냐는 거지. 그러니까 노동자 교육도 원전 읽기, 이데올로기부터 강습해야 하는데 요즘은 노동법 같은, '이기기 위한 교육'을 하는 거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 참 맞는 말이에요. 우리는 자본주의형 인간형이잖아요. 사회주의형 인간형을 길러내야 해요. 


역사를 믿으니까. 노예제가 무너지는 데 500년이, 봉건주의가 무너지는 데 800년이 걸렸어요. 자본주의는 당연히 더 오래 걸리겠죠. 내 생전에 볼 수는 없어요. 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올 거야. 


돈에서는 자유의 냄새가 나잖아. 


나는 인생을 헛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신부전증, 간과 신장 이식, 끊임없는 좌절과 실패, 이기적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감, 하지만 그에 불구하고 계속 그를 현장에 붙잡아 놓는 것. 빚 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먼저 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역사에 대한 믿음. 아들의 이름은 '승혁'.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꿋꿋이 살아오신, 수많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원점으로, 언제나 원칙을, 언제나 원전을 기억하는 저 끈질김. 참 바보 같아 존경스럽다. 


"사람에겐 생명이 두가지 있잖아요. 자연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 자연적 생명이 다하더라도 사회적 생명은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어요?"

일기



130104





130107




121223 둘로스, 박경숙 첼로 앨범






공연이 열린다는 소극장은 모텔이 늘어선 종로 뒷골목에 있었다. 운이 안 좋다면 치한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골목이었다.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자 거짓말처럼 아담하고 깔끔한 호텔이 나타났고, 소극장은 그 지하에 있었다. 가겠다고 한달 전에 말해둔 탓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간 참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 없어도 다를 것은 없었다. (이런 일의 대부분이 그렇다. 꼭 내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 '꼭 필요한 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집합체가 필요하다.) 뒷풀이를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서점에라도 들러서 잠시 숨을 돌려야겠단 생각에 잠시 어디 들렀다 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노트라도 가지고 나왔다면 카페라도 갔을 텐데, 술을 마실 작정을 하고 지갑과 핸드폰만 들고 나왔더니 카페에 가기도 애매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라도 달아볼까 하는 마음에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찾았지만 작은 내 방에 두기엔 너무 큰 것밖에 없었다. 목적을 잃고 두리번거리던 참에 음반 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글렌 굴드가 눈에 들어와 다가갔고 이내 점원이 말을 걸어왔다. 점원은 친절했다. 여자는 이것저것 권해주며 자기의 선호도나 감상을 말해주고 남자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녀가 설명해주는 앨범을 틀었다. 파블로 카잘스의 무반주 첼로 조곡과 그녀가 추천해준 박경숙의 첼로 앨범 가운데 고민하고 있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겨울에 무반주 첼로 조곡은 좀 외롭죠. 반면 이 앨범은 라흐마니노프가 들어있어 따뜻하기도 하고 녹음 상태도 아주 좋아요. 지난 주에 나간 OO공연에 판매를 나갔는데 음악하시는 분들이 이 앨범을 아주 많이 사가셨어요. 첼로와 피아노가 함께 하는 편이, 덜 외롭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까요."



엘라 피츠제럴드의 초기 앨범을 집어들자 매대 뒤에 서 있던 남자는 작지만 믿음직스러워보이는 오디오로 엘라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앨범 케이스가 틴 재질이라 아주 귀여웠지만 며칠 전에 재즈 앨범을 잔뜩 산 탓에 그 앨범을 사기는 좀 꺼려졌다. 파블로 카잘스와 박경숙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박경숙을 고르고, 생뚱맞게 '천년의 왈츠'라는 아주 촌스러운 커버의 앨범을 샀다. 추천해주는 여자가 믿음직스럽기도 했고 2CD 구성인데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왈츠곡만 모아놓은 거라고 했다. 남자가 때맞춰 대중적이고 내가 아주 좋아하기도 하는 왈츠곡을 틀어주는 바람에 엉겁결에 박경숙과 천년의 왈츠 앨범을 사고 말았다. 늘 이런 식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현악기로 연주한 버전도 여자가 추천해줬지만 차마 '전 첼로나 콘트라베이스(한마디로 저음역을 담당하는 현악기들)를 제외한 현악기가 싫어요'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글렌 굴드를 며칠 전에 샀으니 카잘스를 샀으면 좋았을 텐데. 아침에 어울리는 무반주 첼로. 천년의 왈츠를 카잘스로 교환하고 싶지만 이미 뜯어버렸다. 


핫트랙스에서 이런 서비스를 받다니 뭔가 감동. 그러니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듯이 음악을 좋아해서 핫트랙스에 취직한 사람도 있는 걸 텐데. 어쨌든 이렇게 좋은 추천을 받을 수 있다면 오프라인 매장을 더 자주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서가를 어물쩡대다가 세계문학전집 할인을 하기에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샀다. Y 언니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책을 열권 사면 그 중에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책 한권 찾기가 아주 힘들다. 예전에 교보에서 이렇게 어슬렁대다가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산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같은 행운이 따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니 씨네21을 사려고 일부러 잡지가 있는 계산대에 줄을 섰는데 정작 계산할 때는 잡지를 달라고 하는 걸 까먹었다. 


생각보다 가까워보이는 거리에서 뒷풀이를 하고 있었지만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실 기분도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나니 갑자기 뱅쇼가 마시고 싶었다. 집에 남은 와인은 있었고, 검색을 해보니 필요한 건 시나몬 스틱, 정향, 오렌지, 레몬. 시나몬 스틱은 시나몬 가루로 대체하기로 하고 정향 따위는 필요 없다. 마트에는 오렌지도 레몬도 없었지만 자몽이 있었고, 수입맥주를 다섯병에 만원에 팔고 있었다. 토마토와 자몽, 산미구엘을 비롯한 맥주 다섯병, 육포와 밀가루(갑자기 피자를 만들고 싶었는데 또띠야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집에 와서는 의욕을 상실하고 남은 건 강력분 1kg.), 우유를 샀다. 


집에 와선 새우-토마토-바질 수프(라고 하긴 어렵지만)를 끓였고, 뱅쇼를 끓였다. 한병을 통째로 끓이는 레시피의 '50분간 끓여라'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바람에 반병도 안 되는 남은 와인은 다 공기 중에 날려버리고 말았다. 결국 미니 와인을 한병 더 열어 끓였고, 그마저 컵에 따라보니 반컵밖에 되지 않았다. 반컵을 마시고 나니 감칠맛이 나 결국 편의점에 가서 와인을 한병 더 사왔다. 술을 하루에 여섯병이나 사다니.


어쨌든 집에 와서 들어보니 박경숙 앨범은 예상한대로 좋고(라흐마니노프가 따뜻한지는 잘 모르겠다), 천년의 왈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블로 카잘스를 살 걸 그랬다. 아니, 아무래도 겨울에 첼로 조곡은 외로우려나. 그래도 '천년의 왈츠'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며칠전에 무려 '책 판 돈'으로 산 재즈 앨범 30장 박스 세트는 아주 만족스럽다. 케이스도 귀엽고 나같이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나하나 감상하기 좋다. 아무리 MP3 다운로드가 쉽고 편하더라도 물질성 있는 CD의 만족감은 비길 게 못 된다. 지금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포트레잇 인 재즈> 재생 중. <왈츠 포 데비>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좋다. 그나저나 박스 세트를 사는 바람에 <왈츠 포 데비>는 두장이 생겼으니 한장을 누굴 줘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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